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하는 신앙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율법의 요구에 도달할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누구도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되는 복)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오직 인간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뿐임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또 다른 의(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의로움)의 길을 제시하셨다.
바로 복음이다.
율법은 복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선생이다. 그렇다고 율법이 폐기되었는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완성)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전가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심인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지상생애가 율법에 순종하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능동적 순종》이라 명명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수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의 수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그리스도가 사신 지상생애 33년이 율법을 지키기 위한 순종의 기간이었던가? 전혀 아니다.
이는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수여자이시지 율법을 죄인들을 위해 대신하여 지킬 필요도 없으시다. 또 《율법을 지킨 의》를 전가하실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미 가지고 계셨는데, 왜 율법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율법 아래 나셨다고 율법을 지키는 생애를 사셨다고 하는 것은 거짓 복음이다.
이는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에 대한 오해, 해석의 오류는 심각한 폐해를 가져온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단절이며, 영원한 심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율법이 요구하는 것 =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는 우릴 위해 《자신을 죄값을 대신하여 치룰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롬10:4)
롬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자신을 속죄제물(생축과 같이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사건이다.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십자가로 화목하시고 구원하심)에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참예하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완전한 의》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의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는 언약으로 말미암는다.
이처럼《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설교가 달라지고, 믿음의 내용도 달라진다.
이는 기독교신앙의 핵심적 요소이고, 정수(精髓)라 말할 수 있다.
정수(精髓, Marrow)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뼈 속에 있는 순수한 골수(骨髓)를 의미" 하지만, 《사물의 중심이 되는 골자(骨子)나 요점》을 말한다.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
18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율법폐기주의를 주제로 한 매로우 논쟁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정수논쟁(Marrow Controversy)은 18세기 신율법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내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종교개혁시대는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여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 얻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신학을 이어받은 정통신학이 점차 신학만을 강조하면서 딱딱하고 메마른 이론(신학)뿐이라고 생각되어 가던 때에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체험- 토마스 아켐피스 계열의 잔느귀용) 신학이 등장한다.
이후로 청교도로 불리는 시대에는 둘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인 체험신앙을 강조하면서 개인적 경험(존 웨슬리)에 초점을 두면서 지나치게 사변적인 철학이 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신율법주의 신학이 정통신학과 대척(對蹠, 서로 정반대가 되는 것) 되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1) 율법폐기론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칭의론의 객관적인 면을 강조》한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데는 '오직 믿음으로'이다. 이신칭의뿐이다.
2) 신율법주의( neonomianism )는 율법폐기론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간 행위가 반드시 요구된다》는 인간 행위의 강조하는 신학적 이론이다.
신율법주의의 대표적 인물로는 저 유명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주장하는 신학을 배경으로 한다.
신율법주의 신학사조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믿음과 회개, 행위로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신학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공로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서 신율법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회중(불신자)의《회심》의 문제였다.
《회심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이다.
신율법주의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구원하시는 공로의 어시스트를 받아 인간이 골(구원)을 넣는 주인공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름인데, 신율법주의는 복음에 새로운 율법(인간의 행위)이 주장하는 신학사조이다. 즉, 인간의《믿음과 회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논쟁의 배경은 1717년 스코틀랜드 한 노회의 목사고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이 정통교리가 아님을 믿습니다. 곧 그리스도께 나아옴과 우리와 하나님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I believe it is not sound and orthodox to teach that we must forsake sin in order to our coming to Christ, and instating us in Covenant to God.)"
이 질문은 2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신율법주의를 따라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폐기주의를 따라서 회개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이 문장은 그리스도께 나아옴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나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행위가 아무 쓸모없음》을 알기에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구원과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함을 말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다분한 해석상의 오류가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한 목사 후보생이 이 문제에 답을 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이후에 이 목사 후보생은 총회에 안건을 제시하였고, 1718년 총회는 이러한 문장을 제시한 노회에게 이 답변을 올바르게 하지 못한 그 목사 후보생을 목회자로 임직시키라는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하여서 1718년에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 (현대신학의 정수?)라는 책이 재출간된다.
1645년에 에드워즈 피셔(Edwards Fisher)가 쓴 이 책은 4명의 인물 (전도자, 율법주의자, 율법폐기론자, 그리고 어린 기독교인-young Christian)이 특정한 신학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대화형식을 빌어 쓴 책이다.
이 작품은 토마스 보스턴이 한 서재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뒤로 1718년에 제임스 호그(James Hog)에 의해 재출간되었는데, 《신율법주의에 폭탄을 던져버린》 이 책에 대해서 당시 신율법주의를 지지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20년 총회에서 the Marrow (정수)의 신학과 그 지지자들 (토마스 보스턴, 제임스 호그 등)을 율법폐기론자로 정죄하기에 이른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정수 : 신약성경, 특히 로마서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인 율법폐기론》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신율법주의(인간의 행위 = 믿음과 회개)의 선입견으로 정통신앙의 복음(정수)을 바르게 믿는 자들을 정죄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