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의 도(道)에 대해
• 중국어 성경 요한복음 첫 구절은 '太初有道.'(태초에 도가 있었다').
• 우리말 성경번역 초기에는 ‘태초에 도(道)가 계시니라’고 했었다.
지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 동양사상에서 만물의 근원을 유일하게 자연철학자인 노자가 "도(道)"라고 했다. 도(道)는 만물의 어머니(기원, 양육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로고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로고스는 우주의 이법 곧 우주 창조의 이법(理法)이다. 리(理)는 이법, 섭리, 우주의 창조 법칙을 말한다. 우주의 현상은 아는데, 그 현상의 실체(본질)를 아는 것은 인간 지성의 영역이 아니다. 그 실체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한 인간의 이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즉, 신의 영역인 것이다. 자연철학자들이 여기까지 인정한다. 그것을 차마 신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여기서 논쟁을 한다. 무신론 자연철학에서는 창조의 법칙으로 보기 때문에 비인격적 실체이고, 유신론 자연철학에서는 창조의 근원을 인격적 실체로 인정한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1:1은 바로 유신론적 입장에서 설명하였다.

노자 사상(동양사상)에서는 만물의 근원이며 우주의 실체, 하늘과 땅의 근원을 <도(道)>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가 깨달은 도(道)는 비인격적 실체였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헬라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인격적 실체(로고스)로 보았다.
동양의 자연철학과 서양의 자연철학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도(道) 혹은 로고스라고 명명했다. 도(道) 혹은 로고스는 동일한 것(문자적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을 말한다. 예를 들면 문자는 다르지만 "μήτηρ=母모=어머니=Mother"는 같은 뜻.
동양의 자연철학에서 도(道)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서양의 자연철학에서 로고스(λόγος) 곧 도(道)는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의 양육자이다.
노자는 자연철학자로서 인간의 이성을 깨달을 수 있는 최고봉에 이른 것이다. 태처부터 존재하는 그것을"도(道)"라 했고, 노자는 도(道)를 비인격체로 인식했던 것뿐이다.
그의 시대에 그의 지성으로 깨달을 수 있었던 한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상 곧 철학은 이성의 학문이므로 이것이 순수 이성을 소유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이다.
● 자연철학에서 탐색한 <도(道)=로고스(λόγος)>
히랍의 자연철학자들(탈레스.... 데모크리토스)-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칸트-.....
1.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자들의 탐색한 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 알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절대자를 인정하였고, 영혼과 육체 이원론을 인정하는 순례자의 입장이었다.
2. 플라톤 : <선의 이데아>, 최상위 존재로서의 선(善)의 이데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절대적인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입장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서부터 내려오는 입장을 취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 : 그가 창안한 개념으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곧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채 만물을 움직이는 자" 또는 시동자(prime mover)는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 또는 '운동자'로 설명한다.
4. 후대의 임마누엘 칸트(I. Kant)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칸트 역시 절대자, 즉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는,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완전한 본질을 알 수 없는 사물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 자연철학과 사상의 흐름이다.
그러나 도(道)는 침묵하시지 않는다.
자기를 피조세계를 통해 드러내고, 소통하며 교통 한다.
도(道)는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도(道)는 누구에게는 자신을 숨기고, 누구에게는 드러내는가?
철학적 사유와 추론으로 우주적 근원을 탐색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비인격적 실체이다. 이성의 학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마지막이다. 그 도의 본질의 외면을 깨달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도(道)가 자신을 계시로 알리고, 비로소 때가 되어 공시(公示)하신다.
요한복음 1: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2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자연철학자들이 그들보다 1천 년이나 앞서서 성경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면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자연철학에서는 신 존재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하나의 결론은 <그것>이 분명 존재하는데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사도 요한은 자연철학이 말하는 도=로고스=선의 이데아=부동의 동자=일자= <그것>에 대해 경험한 것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요한일서 1:1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도(道)]에 관(關)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注目)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生命, 영원한 생명=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존재자)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證據)하여 너희에게 전(傳)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者)니라."
● 요한은 "태초"는 도(道)의 존재를 설명한다.
태초는 물질적 시간이 만들어지기 이전 곧 영원을 의미한다. 영원 속에서 그 영원을 품고 계시는 도(道)가 계시니라. 태초가 설명하려는 것은 시간적 의미보다 도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바울의 서신을 번역할 때는 말씀이라 번역하지 않고 도(道)라고 번역을 했다. 그는 태초에, 상고에, 영원에 계셨던 그가 시간 속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속죄)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가 되셨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十字架)의 도(道)가 멸망(滅亡)하는 자(者)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救援)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라.
● 말씀=도(道)=말씀(신격적 실체)
신약성경 [히브리서 11:3하]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世界)가 하나님의 말씀(道)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KJV]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NASB]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
이처럼 우리 성경 번역 초창기에는 요한복음 1:1을 "태초에 도(道)가 계시니라"라고 했었다.
번역본을 바꾸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번역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번역했다.
● 도(道)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체이다.
다 설명될 수 없는, 그러나 <계시>로서 알게 되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요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그 영원하신 도(道)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도(道)가 되셨다.
● 그 도(道)는 성육신한 진리이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한 존재>이며,
도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며,
그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하늘과 땅의 중보자요,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이며, 안내자, 길(道)이 된다.
요 14:6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이 바로 그 도(道)이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는 본래 하나님의 품 속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드러내려고 성육신 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도(로고스)이다.
* 철학적 사유로 깨달은 로고스[말씀=도(道)]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전히 말(씀)이다. = 철학적, 사상적으로 사용할 때
그런데 로고스[말(씀)=도(道)]은 말씀하신 자의 객관화이다. = 기독교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의미
때가 차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