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과 실존에 대해 《합리적인 이성》은 답할 수 있는가? 다소 위로가 되는 대안은 제시할 수 있으나 실제적인 답은 되지 못한다.
합리적 이성(과학적 사고)이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이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불가지론의 입장이므로 함구하여야 옳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에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지배받아 왔다(노예적 근성이 생겼다. 무맹목적적으로 따른다고 주장)고 믿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생각에서 몰아내고 인간의 이성을 전능자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주체를 만능인 것처럼, 전능자로 인정해야만 했다. 다른 대안도 없다. 불완전하다고 하는 순간 그들의 모든 논리는 허물어지고, 정신나간 사람이 지껄인 이야기에 불과해진다.
그들이 찾고 찾은 노력의 산물은 결국 동양철학에서 답을 찾게 되는데 그 선구자가 바로 니체이다.
그들 스스로가 이성으로도 충분히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들의 신앙이 되었다.
그들은 이성으러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믿으려하지 않는다.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있던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그래서 인간 실존을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는 "종교의 씨앗"을 스스로 고사시켜 버렸다.
이미 그 생명까지 말라 버리게 했고,
그들에게 생명 자체를 있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망각하려 애쓰는 이유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것은 애써 회피하려는 것이다.
시편14편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 스스로가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절대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에서 현실을 극복하라. 운명을 사랑하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한다. 자기도 스스에게 속고 있으면서 남도 그 말에 속게 만든다.
그들이 억지로 "신본주의 신앙"을 상실해 버렸으나 스스로 "인본주의 신앙"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살펴보자.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라고 말했을까?
정말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 시대의 철학마저도 허황되다고 주장한다. 그 이전의 철학을 깡그리 쓰레기통에 던지라고 주장한다. 그는 철학계에 이단아로 불렸다.
그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인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만을 직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적 영여긴 신의 세계는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쇼펜하우어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야말로 인생을 고통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므로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권유했다.
그는 순수하지 않은 지성은 그것의 원인이 되는 의지에 《구속(拘束)》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런 어느 것에 매여있는 박약한 <의지>를 거부한다. 의지로부터 분리되면 될수록 지성은 순수한 면모를 갖춰나간다고 말한다. 또 다른 앎(완전하지 못해도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 것이 의지이므로)이 그를 또 구속한다는 것을 그는 말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가 31살에 저술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칸트 철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만의 독자적 세계관을 설파하였는데, 그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이 말은 <맹목적인 의지>에 이끌리는 세계와 <주관>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를 구분하고 인식을 확장해 표상으로부터 인식의 세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성은 한계가 있고, 불완전함에도 그들은 이성을 전능자로 인정하고 출발하는 학문이기에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
쇼펜하우러의 작품을 읽으면 노장사상을 장자의 글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간의 학문은 누군가 전저 길을 갔던 선배의 길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는 것이다.
즉, 전혀 새로운 길을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쇼펜하우어의 글 속에는 히랍의 고대철학자들의 사상에 기초한다는 것과 이에 동양사상이 가미되어 서구적 언어로 포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니체철학에 대하여
그는 전적으로 기독교의 틀을 거부하였기에 이를 대체할 명분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적 사조와 사상을 극복하려는 발로에서 출발하였다. 니체철학은 나의 젊은 시절의 생각을 지배할 정도였었다.
실존에 대해 심각하고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의 철학에 나를 대입할 수록 나도 그가 가진 허무주의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虛無主義))은 신과 구원,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다.
니힐(nihil)은 라틴어 '무(無)'를 의미한다.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nihill('허무')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철학적 견해이므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찿아야만 했다.
결국 실존주의 철학적 입장에서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즉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 곧 삶을 극복할 《대체재》를 찾게 된다.
나체가 찾은 것은 결국 오래전 조로아스터교(배화교)에서 찾게 된다.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를 일컫는 말이다.
자라투스트라(자라수슈트라, Zarathushtra, Zaraθuštra, Zartošt) 또는 조로아스트레스(그리스어: Ζωροάστρης), Zoroaster(조로아스터)는 독일어로 Zarathustra(차라투스트라)이다.
잠시 조로아스터에 대해 살펴보자.
조로아스터는 어떻게 종교의 창시자가 되었을까? 그 뿌리는 이렇다. 그는 이란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곳은 인도와 접경지역으로 오래전 흑해지역에 살던 아리안족이 인도북부와 중부로 대이동하게 정착하여 만든 카스트제도와 아리안족이 만든 종교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제에게 맡겨져 양육을 받게 되는데, 7살 무렵 사제직의 훈련을 시작했다.
총명했던 그는 일찍이 15살에 신성한 허리띠를 받으며 사제가 되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나 방황하며 삶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른살이 되던 해 그는 봄 축제(마이드요이.자레마)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가 "하오마(신성한 술을 마시는 의식)"에 쓸 맑은 물을 길으려고 가까운 강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가장 깨끗한 물을 길으려고 강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물에서 나오면서 그의 앞에 빛 자체처럼 빛나는 존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존재는 자신을 "보후 마나"(선한 의지)라고 밝혔고, 그를 따라게 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후라 마즈다의 현신과 다섯 불사신 앞이었다. 자라투스트라는 거기서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그에게 자신을 위해 일하라고 명했고, 이에 온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약속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의 개종을 위해 힘썼는데, 얼마나 어렵고 고난이 뒤따랐는지 그는 아후라 마즈다에게 이렇게 하소연 한다.
"당신께서 나에게 최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수행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로 고난을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야스나. 43. 11)
서양에서 찾을 수 없는 답을 동양에서 찾으려했던 니체, 자라투스트라에게 영감을 얻는 그는 서구사상의 신은 배제하고, 인간 스스로가 신처럼 되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을 통해 실존을 극복하고자 <초인>을 도입하게 된다.
그가 찾은 대안으로 "힘에의 의지"는 적극적 사고방식이고,
"위버멘쉬"는 너는 잘할 수 있어 긍정의 힘이고, "영원 회귀"는 유리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자장가이고,
"운명을 사랑하라"는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라는 신념에 의한 안락사이다.
그가 주장하는 "초인"은 인생의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암시하므로써 극구 거짓된 《안정감》을 심어 주고 싶은 것 뿐이다.
니채가 말하는실존주의 철학의 요체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진리가 부재하므로 너 자신이 절대진리를 찾아서 실존의 고통을 극복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힘에의 의지이다. 어떤 절대적인 진리라 일컫는 것에 의지하려는 나약한 의지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 뿐》인 것이다.
니체를 읽을 때에 마치 "긍정의 힘"을 읽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내세가 없는 이 세상에서 유한한 존재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오는 고통과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자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용기를 내어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존의 가치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현실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찾은 대안인데, 동양철학 가운데 유물론 철학을 서구식 언어로 번역한 것처럼 보여진다. 니체가 새로운 것을 찾은 것이 아니다. 동양철학의 언어들을 서구화시켜 놓은 것이다.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읽으면 대단한 작품으로 갈채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 당시에는 히틀러가 교묘히 사용하였다.
"살기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싸워야만 한다. 이 영원한 투쟁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자연의 정복을 확신하며 종국에는 자연을 조소하는 인간이 짊어져야만 할 운명이 몹시 가혹하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로 독일 국민들을 현혹시켜 세계대전을 일으켯고,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나폴레온 힐과 노먼 빈센트 필, 조엘오스틴 등에 영향력을 끼쳐《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사고방식, 자존감의 사고방식, 자기 주도적 삶》낳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