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도 모르는 문제
얼마 전 한 시인이 세바시에서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 많은 학생들이 읽으며 감상하는 것을 뿌듯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씁쓸하다고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가 쓴 시에 대한 해설서와 수능에 난 시험문제 때문이었다.
시인은 문제집에 나온 자신의 시에 대한 문제를 풀었는데 다섯 문제 중에 2~3문제를 틀렸다고 한다.
시인보다 시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만든 문제를 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시를 쓴 저자도 맞힐 수 없었던 문제들이 시험문제로 출제되고 있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배우면서 무엇을 배울까?
그것을 배우면 시를 더 잘 이해할까?
그 문제들을 잘 풀면 시를 잘 쓰고, 또 다른 시들을 더 잘 이해할까?
아이들에게 시를 더 어려운 대상으로 만드는 게 오늘날 교육의 현주소다.
신학과 신앙
왜 신학을 공부하는데 신앙은 안 좋은가?
목사는 신학을 공부했으니 신앙이 안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공부를 안해서 성경을 몰라서일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마 23:13-24)
그들은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화 있을진저'(일곱 번)라고 꾸짖고 계신다.
이제 순전한 마음으로 어린아이같이 젖을 먹음같이 성경을 읽으니 눈물이 난다.
이렇게 말씀은 달고 오며한 것을
매일 이렇게 음미하고 그 맛을 맛보며 꿀송이처럼 달게 먹기를 원한다.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출렁이질 않았을까?
혹시 해설집을 공부하며 거기에 익숙해진 것은 학생처럼 길들여졌던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신학이라는 안경으로 또는 어떤 방법론으로 읽다보니 성경이 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분석(문법적, 언어적,신학으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읽기를 할 때 그냥 작은 소리 내어 읽고 있다.
신학이라는 안내자를 따라
신학의 안내를 받아 성경을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학은 성경이 나온 후에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해설서이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신학이라는 안경을 쓰고 봤었다.
지금은 신학이 없는 상태라 생각하고 읽기로 했다.
신학의 안경을 벗으니 그동안 정형화된 틀 안에서만 보이던 성경, 신학으로 박제되어 있던 말씀이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영화처럼, 성경은 신학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신학이 생겨나기 전 이미 말씀으로 있었고, 그것은 선포였다.
그냥 은혜받기 위해서 오늘 읽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냥 성경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뛰노는 것이 너무 좋았다.
성경이 말을 걸어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그냥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며 저자들과 대화하고, 주인공과 등장 인물들에게, 감독이신 하나님을 만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생각의 틀에 갇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생각을 자유케 하는 것을 경험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신학도 결국은 사람의 해석의 산물이 아니던가.
신학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아니다.
분명 거기에도 나름 언어적 틀에 의해 나를 가둬두는 역할을 한다.
신학이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자 하던 것을 방해한다.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가 오히려 방해물이다.
설교는 그 설교자의 산물이다.
신학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틀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때로 설교자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가미한 MSG가 성경의 맛을 변질시켰다.
한 설교자가 만든 가짜 참기름에 오랜 시간 익숙해진 나머지 진짜 참기름 맛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해야 설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교자 역시 한계가 있다.
그가 깨달은 것은 결국 아주 일부분이라는 것을.
또 그의 해석이나 신학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중대한 오류를 갖게 한다는 것을.
그러나 설교자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신학으로 인해 얻은 유익이 더 많다.
아무리 설교자의 설교가 뛰어나다 해도 절대성을 가질 수는 없다.
성경만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성경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이다. 내 생각도 내려놓고, 내 해석도 내려놓고, 액면 그대로 말씀의 미각이 생기면서 그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냥 주님의 말씀으로 읽혀지고
주님의 음성과 함께
아버지가 주시는 말씀이 들려온다.
모세가 들려주던 광야에서의 그 말씀이 바람과 함께 들려오고, 성경의 행간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과 성경의 현장을 재구성하면서 보니 하나님의 역사가 눈 앞에 새롭게 펼쳐진다.
오늘은 시편 90편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시를 읽었다.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
신학이 없어도 행복하다.
즐겁다.
영혼이 말씀으로 달콤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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