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온유, 마음의 쿠션이 있습니까?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마음이 환경에서 오는 화살에 그대로 노출되어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습니다. 
또한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으로 남에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은 온유를 생각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거나 대처(치료)하는 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상처(傷은 '다칠 상', 處, 곳 처) 
  傷 = 사람(亻) + 햇볕(昜) => 人(사람 인) + 矢(화살 시) + 昜(볕 양)이 합쳐진 회의자
  = 사람이 화살에 맞아 그 상처가 햇볕에 드러남

 상함(傷함: 몸이 다침/ 물건이 깨지거나 헒/ 음식의 맛이 감), 부상(負傷), 손상(損傷)
상처(Hurt)는 '몸이나 마음을 다친 자리', 또는 '흔적'을 말한다. Scratches(긁힌 상처, 찰과상, 어쩌다 맞기)
가정이나 조직 안에서의 상처는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데, 때로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 폭력으로 입은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기억>을 상처라 한다.
특히 마음의 부상과 마음의 흉터라고 할 수 있다.
 
2. 온유(溫柔) 약3:13~18
 - 사전적 의미로는 '성격과 태도 또는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말함
야고보 형제는 서신 야고보서에서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말합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마음의 기능과 온유한 마음
마음은 주로 어떤 기능을 합니까?
마음은 외부의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생각을 끄집에 내어 종합적으로 판단으로 밖으로 드러냅니다.
마음은 외부의 정보가 들어가고, 내 안에 있는 생각이 나오는 통로입니다. 
그 <마음의 작용>에 따라서 외부의 자극이 극소화되기도 하고,
내부의 생각이 통제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7정(히,노,애,락,애,오,욕(구))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희노애락애오구(喜怒哀樂愛嗚欲/懼)의 감정을 가졌다고 하지요.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사랑, 애달픔, 욕망(두려움)는 것을 감정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외부의 압박에 반응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자동차로하면 쿠션(스프링)입니다. 쿠션이 좋을수록 사람도 분노조절을 하기도 하고 외부의 자극을 완화시키거나 삭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경험한다. 
그러한 상처를 주는 자극과 상처를 받는 마음 사이에 <쿠션>이 있다면 덜 충격을 받습니다. 
 이 쿠션을 지혜로운(슬기로운)《온유함》입니다.

자동차에는 스프링이 있습니다.
땅에서 오는 충격을 완충해 주는 것이지요.
사람으로하만 무릎과 같습니다. 
관절 역할을 해줍니다.
스프링 형식으로 된 것과 판으로 된 것이 있고
무게를 지탱하는 것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도 수많은 충격을 받을 때
쿠션의 역할을 해주는 스프링 장치가 있다면 훨씬 마음은 상처를 덜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먼저 알 것은 기독교는 기복종교가 아닙니다.
기복은 복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복은 복을 구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고, 그것이 전부일 때를 일컫습니다. 
자신의 행위나 인격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저 오직 복만 받으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기복종교와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기복종교는 내가 중심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기복은 내가 그 복을 받으려 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복은 대개가 물질이나 내가 잘 되는 외적 요소들로 인격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물질적인 사랑과 희락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요소들로 
그 존재를 행복하게 하여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반드시 복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시편 24:3-5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기독교는 그 사람이 복을 받을 그릇이 되어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복은 인격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며, 하나님을 섬김을 복을 얻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온유, 복이 오는 길

온유는 길들여진 것을 말합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저 좋은 일을 위해 쓰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 야성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련사에 의해 그 힘이 조절되고
불필요한 것에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만 온전히 힘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본래 뜻입니다.
 
온유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평을 구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자극을 주어 나로 분노하게 하고
나를 자극하여 불같이 화를 내게 할 때에 참아야 합니다.
이때에 외부적인 자극과 내 마음 사이에 <쿠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상호 간 파멸을 가져옵니다. 
온유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뜻하고 여유를 가지고 받아줍니다.
그러면 분명 약해 보이고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쿠션이 있습니까?

왜 예수님은 자신을 온유하다고 하셨을까?
이삭도 온유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품>이 빚어지고 변화의 장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갈등공화국입니다.
사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어도 무시를 당합니다. 
그런데 온유는 내 권리를 잠시 내려놓고, 당장은 손해를 입는다 해도 기다립니다.
그러면 분명 섭섭하고 억울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복이 오는 길을 압니다.
분명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온유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잠시 손해보고 섭섭한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이 그를 챙겨 주십니다. 
그에게 그 온유만큼 넉넉히 챙겨 주십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