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낡은 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은 아주 습관이 배어 있습니다. 아떻게 하면 이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요?
개혁(改革)은 기존에 낡은 제도나 방식 갈아 치우는 것, 바꾸는 것입니다.
통째로 바꾸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개혁입니다.
개혁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글자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 고칠 개(改). '고치다', '수정하다'입니다.
고친다는 것은 己(몸 기) + 攵 칠(때릴) 복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 攴 = 攵(칠복) = 卜(점 복) + 乂(벨 예)
'풀을 베다'라는 뜻으로, 후려쳐 쓰러뜨린다는 것을 '삐침'과 '파임'으로 각각 표현한 회의자입니다.
개(改), 자기 혹은 남의 몸(己)을 때리는(攵)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때립니까?
몸을 친다(때린다)는 것은 잘못을 처서 복종시킨다는 말입니다. '고치기 위함'입니다.
改가 들어가는 글자는 모두 좋은 의미로 쓰입니다. 개선(改善: 좋은 방향으로 고침), 개량(改良), 개혁(改革).

바울의 자기 개혁
사도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고전 9:24~27)...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
탐욕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υπωπιαζω ; 휘포피아조, 눈 아래를 치다) 복종(δουλαγωγεω ; 두라고게오, 노예감독이 되다.
"나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두라고게오(dulagogeo)'인데, '노예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쳐서 더 이상 그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사울였을 때의 완고함과 아담적 성품을 완전히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기 위해 자신의 가죽을 벗겨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성화의 한 부분입니다.

죄죽임의 교리와 은혜살림
성령은 신자와 함께 성화의 과정에서 <죄 죽임과 은혜 살림>의 역사를 행하심에 있어서, 신자로 지속적이고 훈련된 노력과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
분명한 사실은 죄는 신자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죄의 '죽임'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질 때 죽게 됩니다.
회개하는 신 자 안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고 바라지만, 자신이 원하는 선을 행할 수가 없고 도리어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로마서 7장).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의 실존 그대로를 고백했습니다.
그것을 자기 혼자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로마서에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교화에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자신은 끊임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갈 2장 20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즉,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볼 때 사도 바울은 《자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는 신자들 안에 은밀한 죄가 남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는 자기의 노력이나 업적이나 수련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힘이나 노력으로 그렇게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제 불능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죄에게 자신을 단 1초도 맡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여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와 다시 살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팔거나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죄가 어떻게 자기를 무너뜨리려 호시탐탐 노리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는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어주면 딴짓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간사해집니다.
조금만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교만해집니다.
아주 몹쓸 자기 존재이기에 자신을 용납하지를 않았습니다.
쳐서 복종케 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었으며,
나아가서는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개혁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기대하며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안에서 《죄는 죽고, 은혜는 살아》납니다.
이것이 날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