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경 제15장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예로부터 도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微妙玄通(미묘현통)
미묘하면서도 지극히 넓고 깊어
深不可識(심불가식)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그걸 알 길이 없지만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대강 형용하자면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겨울에 강을 건너듯 신중하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儼兮其若容(엄혜기약용)
얼굴에는 엄숙함이 묻어있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얼음이 녹는 것처럼 술술 풀리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통나무처럼 도탑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계곡처럼 확 트이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누가 능히 탁한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不欲盈(불욕영) 채우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굳이 채우려 하지 않는 것은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그러므로 새롭게 이루지 않고도 능히 천하를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의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堂號)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온 말인데,
“신중함(與)에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함(猶)에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
다산은 정조와 함께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다.
남들이 볼 때에 그는 지나치리만큼 정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나자 정적들은 그를 18년을 유배 보냈다. 그는 유배지에서조차 게으르지 아니하였고,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어떻게 그 긴 시간들을 이겨냈을까?
그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유(與猶),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마음의 여유(與猶)와 삶의 여유(餘裕)
여유(與猶)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사리판단을 너그럽게 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삶의 여유(餘裕)"와는 다른 말이다.
'여유(輿猶)는 <노자도덕경/ 도경 15장>에 나오는 말이다.
여(與, 豫라고도 함)와 猶는 원래는 짐승이라고 한다. 《여유》라는 짐승은 의심과 겁이 많아 무슨 소리만 나도 재빨리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긴다고 한다.
15장은 <도덕경>은 도를 깨달은 사람에 관한 글이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문학적 깊이가 가장 돋보이는 장이라 할 수 있다.
도(道)는 오묘하고, 깊고, 넓다.
이러한 도를 노자는 일반인들도 이러한 도의 실체를 쉽게 알 수 있게 하려고 다양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앞에서는 대장간의 풀무, 수레의 바퀴통, 그릇, 방, 계곡 등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는데, 15장에서는 도를 깨달은 사람의 신중함을 《겨울에 강을 건너는 사람의 신체동작, 이웃을 대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 얼음이 녹는 형상, 통나무의 질박함 등》에 빗대 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도의 속성들을 <신중함, 엄숙함, 도타움, 확 트임>등으로 설명한다. 이같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하려는 도(道)는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뛰어넘어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 윤리적 규범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흙탕물처럼 탁하다"는 문장과 연결해서 보면 의미를 확실하게 제대로 알 수 있다. 도(道)는 맑음 vs 더러움, 깨끗함 vs 혼탁함,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더러운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서서히 깨끗한 물로 바뀌는데 이러한 프로세스가 일어난다. 그러한 과정 순간, 경계, 즉 변화의 모멘텀에 도가 존재한다.
이같이 자연의 순리에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맑은 상태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자연 그대로 두는 것,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노자의 생각이었다.
마지막 구절의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그러므로 새롭게 이루지 않고도 능히 천하를 덮을 수 있기 때문이다는 해석은 분분하다.
폐(敝) 자의 뜻은 '덮는다'와 ‘이르다(arrive)’로 쓰인다. ‘능히 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가 더 자연스러움이 있다.
도덕경 제15장, 이 문장에 노자의 사상이 녹아져 있다. 불신성(不新成)이란 단어는 혁신이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어떤 것은 인위적 것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