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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이런 삶을 살게 하소서

꿈과 실현

개혁군주 정조(正祖)와 다산 정약용을 만난 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둘 다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군주들은 군주 하나를 위한 나라를 꿈꾸지만, 그러나 정신이 깨어있는 군주는 '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꿈을 꿉니다.
정조가 찾던 신하는 어떤 사람이고, 정약용이 섬기고 싶었던 군주의 상은 무엇이었을까?
정조는 어떤 신하들과 허심탄회한 소통을 즐긴 것으로 유명한 합니다. 열 살 터울인 정조와 다산 정약용은 군신지간(君臣之間)이었으면서 동시에 마음을 나누는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아포카토"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크림의 만남

1. 정조와 다산의 만남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말입니다.
개혁 군주인 정조와 그 꿈을 펼쳐주는 정약용의 관계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 주는 말일 것입니다.
이들의 만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군신 간으로 만나지만, 그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783년 정조는 세자 책봉을 기념해 열린 증광감시의 합격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어전으로 이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정약용을 본 정조는 "얼굴을 들라"말합니다.
당시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21살의 청년에게 용안(임금 얼굴)을 보여 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장조는 이어서 “몇 살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정약용은 임오생(1762년)이라고 말합니다.
그 해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죽은 해였기에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그는 성균 유생들에서 <중용에 대한 질문들>을 내렸는데, 다산은 남인의 명문가 자제이면서도 학설은 노론의 이율곡을 따랐습니다.
이때부터 정조는 아낌없이 다산에게 모든 국정에 관한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줍니다.
그 이유는 다산의 명민함도 있지만, 균형 잡힌 다산의 시각을 눈여갸 보며 앞으로 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재상이 될 인물로 보였습니다.
다산의 총명함으로 인해 훗날 정조는 큰 인물로 쓰고자 여러 가지를 배려하며 가르치고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과도하리만큼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적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18년간의 유배생활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2. 정조의 개혁 정책

다산을 처음 만난 이후로 정조가 죽을 때까지 18년을 정조를 보필하며 따랐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33살에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실태를 조사하고 암행을 하는 동안 경아글 금치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현장에서 보았습니다.
암행어사 정약용은 시 한 수를 지으며 한탄했다.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랐고 /
선반은 새끼로 묶어 무너짐을 막았구나 /
구리 숟갈이야 오래전에 이장이 빼앗아갔고 /
무쇠솥마저 이웃집 부자가 빼앗아갔네 /
닳고 닳은 무명 이불이 오직 한 채 /
이 집에서 부부유별 논할 수도 없구나 /
아이들 저고리는 어깨가 나오도록 헤어졌고 /
이 세상 태어나 바지와 버선은 구경 못했네 /
큰아이는 다섯 살에 기병(騎兵)으로 등록되고 /
세 살 난 작은 아이는 군적(軍籍)에 올라 있어 /
두 아들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
어서 죽기만 바라는데 옷이 다 무엇이랴..."
비참한 백성의 최후를 보는 듯하다.
정조는 그래서 행정적으로는 다산에게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특히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해야 할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를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목민관이 얼마나 청렴하게 왕의 신하로서 직분을 감당해야 함을 세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정조의 원대한 꿈, 왕도정치입니다. 정약용 역시 정조와 마음이 같았습니다.
정조의 간절히 영원했던 꿈은 바로 개혁입니다. 그래서 조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778년 6월, 정조는 국정개혁안을 발표합니다.
그가 천명한 한 과제는 백성들을 모두 부유하게 만들고(공동부유), 인재를 육성하고(인재양성),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부국강병), 국가 재정을 안정(세금)시키고자 하였다.
정조는 당시 자신의 신임을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령들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다산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습니다. 그를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보임시켜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이 정조가 다산을 신임하고 총애하였던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산으로 하여금 국정 전반을 경험하고 직접 관리하게 함으로써 당시 정승이던 채제공의 뒤를 이어 다기와 함께 국사를 펼쳐가기 위해서였습니다.

3. 정조의 위민정신과 다산의 과학 정신으로 만든 화성

4살 때 천자문을 다 떼고, 7살에는 시를 지었다던 천재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해남의 외가에 갑니다.
어린 꼬마는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기이한 농사도구며 생활에 편리성을 주는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신비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린아이 눈에 그저 상상할 수 없었던 독특한 기술과 문물에 관한 서책을 보며 감탄을 거듭합니다.
바로 정약용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가 성인이 되어 정조가 꿈꾸단 화성행궁과 성을 축조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빠른 시일 내에 성이 완성되지 정조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마치게 되자
다산을 불렀다.  ‘네가 거중기를 만들어 무려 4만 냥이나 절감하였구나!’라고 극찬합니다.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안고는/
궁궐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모셨으니/
정말로 임금의 복심이 되어/
아침저녁 참으로 가까이 섬겼다/
하늘의 총애 입어/
소박하지만 정성된 마음이 열리었네/
육경을 정연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어를 옥성시켰네/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니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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