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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1장과 요한복음1장 비교

도덕경은 노자가 써 주었다 한다.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 즉 상, 하권으로 5천 여자로 된 글이다.
상권에서는 <《도》에 대하여 말하였고,

하권에서는 그 <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 되는 《덕》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경 제1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신앙을 가지고 읽는다면 형이상학적 본질을 찾고자 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의 언어는 머물지 않고 깊은 뜻으로 변화한다.

사람마다 사상에 따라 같은 단어를 가지고도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같은  단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또 동일한 것에도 아는 만큼 깨달음의 그 깊이가 제각각 다르다.
앞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길, 道>이라는 낱말(단어)에도 깊이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1차적으로는 본래의 뜻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추상적인 뜻으로 쓰이고,

때로 글자가 합쳐지거나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아래 도덕경 참조)
마찬가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예수에 대해 명함을 준다면 예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도 요한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는 유대-히브리인이니 자신에게 익숙한 히브리어 낱말로 써야 하나,

아니면 소개받는 사람들이 쓰는 헬라어로 낱말을 써야 하나?
그는 자신이 따르고 믿고 고백했던 예수를 어떤 낱말로

그에 대해 소개해야 이방인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고민이었다.
[우리말 성경]
"태초(맨 처음)에 말씀(도)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는 예수를 설명하면서 헬라어《로고스(λόγος)》라는 낱말을 채용했고,

우리말 번역은 《말씀》으로,

중국에서는 《言》'(말씀 언)',

독일어는 《das Wort》,  

현존하는 일본어 성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초에 한 지식인이 있었다”라고,

킹제임스역《 the Word》 로 각각 번역했다.

 

헬라어 로고스(G3056: λόγος. 말, 진술, 연설)는
① 이야기, 연설, 말로써의 '설명'
② 하나의 원리, 증명 또는 설명(상업적으로는 계정)으로서의 계산의 결과
③ 수학적으로는 '비례', '관계', 또한 더욱 일반적으로는 '기준'이나 '순서'
④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이성, 정신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에 매우 절묘하게 연결한다.
첫째는 창세기 1:1이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영원성,

독자들, 청중을 천지창조의 시간에로 이끌어 간다.

헬라어로 《엔 아르케》는 태초이다.

시초, 시작에, 맨 처음에 등이다.

영원한 시간과 비로소 창조의 시간이 시작되는 그 시점이다.
②창조성,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가 창조하신 일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히브리어《다바르》= 헬라어 《로고스》는 절묘한 연결이다.
③인격성,

로고스는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알리려는 것으로 본래는《로고스》비인격적이다.

하지만, 요한은 태초라는 영원에서 창조의 시점에

실제적으로 창조행위를 발동하신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알린다.

"태초에《로고스》가 계시니라"로 설명한다.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이성과 관련된 것이거나 우주의 이법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헬라인들을 우주의 이법 그 이상으로 그들을 신적 세계에로 이끌어 간다.

헬라인들인 신화를 통해 형이상학의 세계를 추론하고 이해하였는데,

요한은 그들이 생각하던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고작 신도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이고 죽고, 다시 살리고 , 미워하고.... 인간적인 것을 가진 뛰어난 존재였다.
그러나 요한 그들보다 더 명료하게 "더 뛰어나고 확실한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는 헬라 신화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가 연결되는지

<로고스>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요 1:1~18).
그는 태초에 계셨던 말씀 => 성육신(말씀이 사람이 되심/중보자) => 독생자(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 => 본래 그는 하나님의 품에 계셨던 분 =>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그 하나님을 나타내려(알리려) 사람이 되오 오심
④신성, 동격성

이 모든 것을 요 1:1~4, 8~18에서 머든 것을 깔끔하게 해결한다.
요한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이미 천지창조 전부터 존재했던 분이다.
성육신 이전에 그는 말씀, 즉 로고스로 불리는데

이 로고스는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존재(선재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어 알리고자 했다.
이는 신성의 3가지 조건으로 그는 창조 전 이미 존재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공존하셨고,  

또한 스스로 존재하심으로 예수는 본질상 성부와 같이 실체로는 하나님'이셨다는 것까지 모두를 설명한다.

 

노자 역시 비록 그가 철학자였지만, 신존재 증명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세계의 시작과 그 기원은 어디에서 출발해야만 하는가?
천지의 始原(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하였고,

그가 내린 결론은 "만물의 시작을 도(道)"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도를 다 설명할 길이 없다."고 선언한다. 

사실 인간은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처음에, 시초에"를 알 수가 없다. 

추론할 뿐이다. 아니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도덕경 1장 하나를 놓고도 가진 지식에 따라 해석과 설명을 달리한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無자는 '전혀 없다'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활애서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해석학·미적분학(Analysis · Calculus)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보면 '무한(infinite/무한(無限)'이란 무엇인가?
상대적 무한과 절대적 무한이 있다.
'있을 유[有]'와 '없을 유[冇]'
有 [있을 유]와 冇 [없을 유] 자는 엄마의 배 속에 아기가 들어 있을 유[有],

임신하지 않은 상태로 아기가 없을 유[冇]이다.

 

없다와 있다

처음에 물질계는 없음의 상태였다.

그러나 신의 계획 안에 숨겨져 있었다.

비로소 그의 명령으로 있음이 되고, 이름이 부여되었다

 

[도덕경 제1장 원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邀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道可道 非常道;  道는 道라 해도 (누구에게나) 항상 같은 도가 아니며
   => 도는 무한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고, 다 표현하거나 설명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名可名 非常名. (그) 이름을 (그) 이름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그) 이름이 항상 같지 아니하다.
=> 그 무엇으로도 형용하기에 그지없기 때문이다. 듣는 이마다 다 다르게 이해한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아직) 없어도, (도는) 천지의 처음[시초/근원/시원]이다.
   => 그것이 도(道)라고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 無名이름이 없었던, 아직 붙여지지 않았던 그때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있은 후로도, 만물의 어머니로다.
   => 도(道)라고 有名 이름이 지어진, 붙여진 후
• 故常無欲以觀其妙,  그러므로 늘 욕심 없으면 이로써 그 묘함 그대로를 보고
  => 청결한 마음만이 그 도를 있는 그대로 보고

• 常有欲以觀其邀. 늘 욕심이 있으면 이로써 그것의 변죽만 본다.
  => 청결치 못한 마음은 그 도의 변두리만 보니
此兩者同,  이에 둘은 같으나
出而異名. 밖으로 나오면 이름을 달리한다.
同謂之玄,  같은 것을 일컫기를 심오하다 하고
玄之又玄,  심오하고 또 심오하다 말하네.
衆妙之門. 묘한 많은 것들이 (나오는) 문이로다!
=> 도는 세상만물의 오묘한 것들이 나오는 통로이다.

도(道)는 인간의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만물의 시작이며, 시초요, 도(道)가 만물을 존재하게 하기 이전이나

그 이후나 변함없는 도(道)는 심오하고
모든 것이 나오는 문(통로)이다.


• 玄(현)은 우주를 표현한 것인데,

너무 멀고 아득함이 오묘(奧妙)하게 여겨지고, 육안으로는 검게 보인다.

그 뜻으로는 즉, "심오(深奧)하다. 아득하다. 신묘(神妙)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玄) 자는 제부수로 된 글자이다.
  [ 玄 = 亠 + 幺 ]
먼저 돼지해머리 두(亠)와 아래에 작을 요(幺)의 합성된 글자로

심오(深奧)하고 아득함을 나타내는 유원(幽遠 : 저 멀리 그윽하고 외딴곳)의 뜻을 나타내는 회의자다.
玄은 매우 뛰어나고 탁월하며 높은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천자문의 첫 시작도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표현했는데,
우주공간은 육안으로 볼 때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고, "검게 보인다"는 뜻보다는

‘가물가물하여 아득하다’는 뜻이 더 많이 담긴 글자이다.

만일 "검다"는 단어로만 해석한다면 전혀 다른 뜻이 되고 만다.
공자와 같이 가장 뛰어난 성인(聖人)을 현성(玄聖)이라 하고,

손자(孫子)의 손자를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현손(玄孫)이라 부르며,

속 깊이 간직하여 드러내지 않는 덕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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