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한 친구인가?
어떻게 친구 관계로 맺어졌는가 중요하다.
키케로는 진정한 친구는 선한 사람들 서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선하다는 말은 '성실과 정직과 공정성과 아량'을 가진 것을 말한다. 옳은 일을 하는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을지언정 우의를 위해서 맺어진 관계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맺어진 관계라면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없다.
라틴어 우정(amicitia)과 사랑(amor)은 어근이 갖다.
친밀한 관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참 벗이라고 밝히셨다(대하 20:7, 사 41:8, 약 2:20-25).
사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Abraham my friend)의 자손아” “나의 벗 아브라함”(시편 41:8)
'벗'이란,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이라 호칭하여 주셨는가?
그러한 벗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신뢰했다. 사실 성경은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친구는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창세기 22:1-19)
그가 진실로 하나님만 의지하는가?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는가?
아브라함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그는 독자이다. 그를 번제 곧 제물이 되는 짐승을 잡아서 각을 뜨고, 그 몸뚱이를 불살라 태워 재가 되게 하여 바치는 제사를 하나님이 지시한 돗에 가서 이행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일어나 종들을 데리고 간다.
말씀하신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종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이삭에게 나무를 짐 지우고 산으로 향한다.
그는 이삭과 대화를 나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 : 내 아버지여
아브라함 :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 :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 :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는다. 그리고 제단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한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하고자 원하시는 일은 그 일이 무엇이든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불에 태워 잿가루가 되게 한다 할지라도 그를 도로 살려내실 것을 믿었다(부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네 씨로 말미암아
로마서 4: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것이 믿음이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그는 하나님 앞에 그의 믿음을 증명하여 보여 주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실행하는 믿음
창세기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제 친구가 무엇이며, 어떤 관계인지 이해되는가?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누가 자기의 목숨이 소중함을 모를까?
그런데, 대의를 위하여 죽는 자들이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단이 필요할까?
빚을 대신 갚아 준다던지, 대신 매를 맞아 준다던지, 잘못을 대신한다던지 이런 일들은 사람으로서 가능해도 부모도 아니고, 형제도 아닌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이 가능할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개역한글)
“μείζονα ταύτης ἀγάπην οὐδεὶς ἔχει, ἵνα τις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θῇ ὑπὲρ τῶν φίλων αὐτοῦ.” (요 15: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hat someone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for his friends"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친구(G5384: φίλος, 필로스) : friend.
구약에서 우정을 귀한 가치로 여겼다. 하나님에게 벗이 있다. 아브라함(대하 20:7)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되었는가?
야고보서 2:23에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벗이 되었는지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고= 실행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즉 친구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런 사랑은 우리 역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신 6:5).
누가복음 12:4에서 유일하게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지칭하면서 ‘호 필로스 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와 뜻이 같다.
참된 친구는 사랑으로 증명된다.
히브리어로 ‘사랑’을 אַהֲבָה(아하바)라고 한다. 이 명사는 ‘사랑하다/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אָהֵב(아헤브)에서 파생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바친다(devote)'라는 뜻으로 실천적 '행동'이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장 8절)
히브리어로 "친구" 6가지
가 있는데, 70인역본에서 필로스로 약 180회 번역되었다.
1) 레아(H7453: 친구, 신 13:7; 욥 2:11; 잠 3:29; 잠 6:1; 잠 6:3 등) = רֵעֶה(레에) 혹은 רֵעַ(레아)는 이웃을 나타내는데, 신뢰를 바탕으로 연합된 동료, 이웃, 친구
2) 아헤브(H157: 사랑의 행위를 하다(분사) 호세아 3:1 그 여인을 사랑하라.
삼하 1:25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히브리어로 '사랑'은 אַהֲבָה(아하바)
이 명사는 '사랑하다/좋아하다'란 뜻의 동사 אָהֵב(아헤브)에서 파생했다
친구, 에 5:10; 에 5:14; 에 6:13; 렘 20:4; 렘 20:6)
오헵 = ‘사랑하는 사람’, 아하바= 아카페
3) 메레아(H4828: 친구, 동료, 삿 14:20; 삿 15:2; 삿 15:6)
4) 샬롬(친한, 친구, 렘 20:10), '샬롬 카베림(안녕 친구여)”
5) 알루프(H441: 친한, 친구, 잠 16:28; 잠 17:9),
6) 하바르(H2269: 친구, 동무, 단 2:17; 단 2:18)의 역어로 사용되어, '친구, 동무'를 나타낸다.
연인 관계에서도 서로를 '하베르/하베라'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와 같이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믿는 자는 예수의 친구이다(필로스 φίλος, 요 15:13, 15).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선택하시고 친구로 불러 주신 것에서 출발한다.
이보다 더 우리에게 확고한 안도감을 주는 것이 아디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결코 식언치 않으신다.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가 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친구가 되심을 증거 해 주셨다.
이제 예수님의 친구가 된 제자(우리)들의 지위는 특권과 함께 책임이 동반된다.
주여!
나도 주님의 친구가 되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의 신실한 친구가 되게 하소서.
나도 주를 위해 온전히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장 7〜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