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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거기로 가야 하는 이유(3)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지만,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존하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로 들어가면 죽을 것 같지만,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여 가시기 시작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1장 1~6절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선포한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마태복음 3장 1-3절)

그에 대한 예언의 성취인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왜 갑자기 광야에서 요한이 등장하고, 왜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까?
요한복음 1장 6~8절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왜 요한은 독특한 방식으로 등장할까?

한편 요한은 광야에서 산 메뚜기와 꿀을 음식으로 삼았는가?, 성서학자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메뚜기와 석청을 '쥐엄나무 열매와 대추야자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히브리어(아람어)를 그리스어로 서술하는 과정에서 오기(잘못 기록)하였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쥐엄나무'는 실제로 히브리어에서 '메뚜기 나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대추야자 역시 지금도 중동에서는 그 즙을 꿀 대용품으로 사용합니다.

대추야자가 떨어지면 돌들이나 풀 사이에서 마르게 되는데, 마치 감이 떨어져 곶감처럼 마르게 됩니다.

그러면 마치 대추야자 열매가 숙성되어 마치 꿀처럼 달고 맛있는 말린 과일이 됩니다.
실제로 야생 메뚜기와 석청을 찾아서 주식으로 먹기는 불가능 수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야생 꿀이라면 당시에 고가품인데, 식용으로 쉽게 채취하는 일도 아닙니다.

유대교에서는 메뚜기 열매와 대추야자 열매를 가난한 이들이 먹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여기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그가 외치는 소리는 <회개하라>였습니다. 그 소리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설교는 논리로 불타야 합니다. 

그 불로 청중들의 마음을 태우고 완전히 불살라야 합니다. 

그래서 청중은 언제나 죄를 고백하고 

뒤이어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게 하는 외침이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세례를 받고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완고하게 굳어진 심령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북어처럼 딱딱해져 홍두깨로 두들겨야 부드러워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망이와 같습니다.

돌같은 마음, 목석같은 심령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마침내 변화되어야만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려옵니까?

세상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가 사람을 변화시켜 줍니까?
인간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하여 마른 멸치가 되었다면 불에 볶으면 됩니다.

세상의 소리, 도시의 소리, 자본주의 소리, 공산주의 소리, 사회주의 소리, 정치인의 소리, 경쟁의 소리뿐입니다.

사실 아우성입니다.

그 속에서 내 영혼에 도움을 주는 것은 0.1%도 없습니다.

불안, 염려, 우울, 절망의 소리뿐입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소리는 광야에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만큼 변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늘의 자원을 사용하며, 마음을 온전히 치유받고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을 치유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온갖 상처와 고통, 문제들을 만납니다.
무엇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치유해 주던가요?
잠시 잠깐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인문학이나 심리학, 철학은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망령이 세상을 거짓으로 변혁시켜 국민을 비정상적인 유물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오직 진리의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만 참 자유가 있고,

정신적 자유와 치유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회주의는 이러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까지도 통제하고 있고, 또 통제하려 합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으로 존중을 받지 못합니다. 

개인은 국가 체제를 위한 소모품일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외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

말씀에 붙들려 올바른 생각과 사유를 통해 진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이 세대에 살아갈 유일한 길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has lived.")

- 폴 부르제 / Paul Bourget -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틀)를 아노라"
개역성경은 이 '생각하는'을 '상상하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KJV]-" for I know the inclination of their behavior today"
[NIV]-  "I know what they are disposed to do"  
여기에서 '생각하다', '상상하다'의 히브리어 예쩨르(יֵצֶר )는

"내 생각을 빚어가고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imagination frame, form, framing, mind, thing framed, work,  purpose, framework)
오늘도 우리는 광야의 소리를 통해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만들어 가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생각이 나를 만들고, 나를 세우고, 나의 인생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영이 살고 죽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광야로 나아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https://youtu.be/2zfn4_eQY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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