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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轉嫁)의 원리

신학은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들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쉽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의 하나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울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말합니다.
<함께>는 동행이며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간저히 열망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지 않고는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이 없이는 동행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와 동행할 수 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님은 아무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자기 죽음)입니다.
원문은 '자신을 버리고'를 '아파르네사스토'인데,  이는 '(어떤)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강한 부정의 의미를 의미합니다.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혹은 유혹을 강력하게 물리치는 행동을 나타낸다.
자기부인은 자신의 의지와 뜻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구와 육체의 유혹을 허락하지 않으며 단호하게 물리치는 적극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갈라5,17).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과 청중들에게 십자가는 그저 <십자가 : 사형수를 사형시키는 틀>였을 뿐입니다. 그 니무로 만든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사형을 당하는 죽음의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 그리고 가장 비참한 최후를 상징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가게 했습니다.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지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가 처형될 도구>로서 조롱과 고문, 그리고 죽음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하실 때에는 <죽을 각오, 욕을 먹을 각오, 고난 받을 각오>를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말씀하신 이유를 간파했습니다. 갈2:20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그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묘사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복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누가복음 9:24-25; 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5-36).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따를 수 없는 길이요, 고난을 외면하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려면 이처럼 선행적으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나는 육신으로는 지기 싫으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짊어짐>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한번이 아닙니다.
'he must'입니다. 일평생입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변함없이 처음처럼 따르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따르라'는 원어는 '아콜루테오'(ἀκολουθεʹω. 따라가다, 쫓다)는 현재형입니다. 현재진행 명령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 행위가 쉼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림자가 본체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동행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예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와 동행하라는 뜻입니다.
동행은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리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기를 부인해야만 예수를 따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골수분자였던 그가 예수를 따르는데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율법입니다. 율법의 멍에입니다.
거기에 매우 충실하게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가 충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롬 11장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갈2장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그는 철저하게 율법과 결별했습니다.

1. 영적 연합의 교리

그리스도를 따르며 <동행>하고자 한다면 영적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통해 예수 믿기 이전의 자신 곧 아담적 신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못 박히는데 내어 준 것입니다.

2. 전가의 교리

전가(轉嫁)는 책임이나 문제를 타인에게 떠 넘기어 맡기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이 다른 대상에게까지 옮겨 가는 것을 일컫는다.
전가(轉嫁)는 주로 '책임을 전가하다'는 말로 쓰이는데,  ‘떠넘기다’라는 뜻입니다.
한자로 '전가'는 '轉嫁'라 쓰는데, '轉'은 '옮기다' '바꾸다'라는 뜻의 '구를 전'이다. 어디로 굴러가다. 존재나 소속 등 위치가 변경되는 것을 말한다.
'시집갈 가嫁'를 쓰는데, 여자가 집을 옮겨 시집에 살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학교를 옮기는 것을 '전학(轉學)'이라 하고, 부대나 사무를 옮기는 것을 전출(轉出)'을 가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같은 말을 자주 쓰곤 하지요.

우리들도 <믿음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내 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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