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어디까지 경험하셨습니까
세상 사람 누구나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에도 남자들은 군대를 갔다 오면 자신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자랑거리입니다.
또 같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끼리도 서로 자랑을 합니다.
"고생"한 것이 무슨 자랑거리입니까?
사실 그들이 경험한 것이 특별하고 남다르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해병대나 특수부대에서 복무했던 분들은 그것 자체가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남다른 경험이나 여행한 일, 특별한 선물을 받은 일, 남들에게 없는 것을 소유한 일 등등
우리 교회 집사님이 아랍에메레이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얼마전 윤대통령이 방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인도 함께 그곳에서 사업을 하는데, 마침 사위가 대통령실 경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나를 글쎄 윤대통령님하고 사진을 찍게 해 주고, 대통령과 악수를 하게 주지 않겠어!"라며 얼마나 자랑하고 다니던지요.
그렇습니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못해 본 일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하는 말,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자랑하며 호들갑이던지."
"사실, 그거 별거 아니잖아요."라고
집사님과 계속해서 대화하면서
"집사님, 우리의 자랑거리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지요?"
"그럼요. 목사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잖아요."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자랑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자랑거리
여러분도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요?
누구나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닙니다.
♪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 날 부러워해
성령충만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부귀영화 부럽지 않네
예수님의 신부 될 것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하늘나라 천군천사 날 부러워해
영원토록 누릴 영화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 사람들은 육체를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지 아니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일이나 육체보다 더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나'는 앞에 있는 모든 이야기 일체를 강하게 부정하는 <역접 부사>입니다.
이 세상사람과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를 강조하고자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즉,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육체를 자랑하지만,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처럼 사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하게 했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요, 거기에서 죽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그 십자가가 자랑거리입니까?
거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십자가로 증명했고,
그 십자가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가장 극적이고 완전하게 자신의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안에서 우리 옛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자신을 생축과 같이 제물로 드린 그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나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바라보며
내 죄를 인하여 그가 죽으신 것을 깨달아지고
가슴이 저미도록 내 죄를 회개하며 한없이 통회할 때까지 나를 그 십자가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고전 2장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한 그 십자가를 경험하라
그러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를 어떻게 경험하였습니까?
그 십자가의 놀라운 비밀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실 그 당시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수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고,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자랑거리가 많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전위대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행 9장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때의 그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딤전 1장 13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던 그가 이제는 거꾸로 예수를 전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딤전 1장 14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기와 같이 극구 부인하던 자들도, 대적하던 자들에게도,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가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리스도게로 돌아와 구원 얻으며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로는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랑거리였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똥)처럼 버렸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고, 그가 갈망하는 바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면 무엇이 사도로 하여금 이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자기를 그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것은 바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ἐμοὶ δὲ μὴ γένοιτο καυχᾶσθαι εἰ μὴ ἐν τῷ σταυρῷ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δι’ οὗ ἐμοὶ κόσμος ἐσταύρωται ⸀κἀγὼ κόσμῳ.” (갈 6:14)
“But far be it from me to boast, except in the cross of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ich the world has been crucified to me, and I to the world.” (갈 6:14, WEB)
“십자가에 못 박히고(ἐσταύρωται)"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는 우리말로 '십자가' 번역되었습니다.
본래는 위로 향한 막대기, 기둥을 말하는 '곧은 기둥'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최고형인 사형을 집행하는 도구로 나무기둥을 사용하게 되면서 로마시대에도 이방인들의 사령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21장 22~23절에는 하나님께 저주받을 죄를 지은 자를 나무에 달아 두었습니다.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못 박히고"(ἐσταύρωται)
- εται 직설법, 현재완료, 수동태 3인칭 단수, 시제는 "현재완료형"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못 박다. 내가 못 박다(중간태나 수동태의 형을 가지고 능동의 뜻을 표현하는 동사)
사도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언제 못 박았습니까?
그리스도를 알고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그리스도(아담 이후로 그토록 기다려오던 구세주이신 메시아)께서 십자가에 "죄인-바울"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모르고 아담(자기가 자신의 주인인 삶)적인 삶을 살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이후로도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켜 왔습니다.
또한 지금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철저히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때 그 사건이 현재까지 바울의 실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구원의 사건과 주관적 적용
2천 년 전 골고다에 예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사건은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누구도 그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지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비하셨고, 때가 차매 그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전 15:3~4)는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체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우리가 그 십자가에 앞에 단독자로 설 때에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그 사실을 믿는 자의 영혼을 적시고, 깨끗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의미, 곧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임을 깨닫고, 자신을 그 십자가에 못 박고 함께 죽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롬 5장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성령이 이 복음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거듭나게 하사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에 마음에 깊이 다가왔을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목케 하는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할 때에 그 보혈로 나의 마음과 영혼을 정켤케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과 한없이 성령을 부어 주셔서 영혼이 환희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세상에서 자신의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다 버려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참예할 수 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버리고 또 버리며,
세상이 바울을 버렸어도 슬프지 않았고,
자신 또한 세상의 즐거움과 자랑을 버릴수록 더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버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아! 네가 날 버렸느냐
나도 널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https://youtu.be/dxvf36sXF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