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약성경에 나타난 바실레이아(G932)의 용법
(a) 일반적 용법.
인간인 세상의 왕에 상응하여 세상의 인간 왕국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실레이아는 문맥에 따르면 '왕직' office of king이며(예: 눅 19:12; 눅 19:15; 계 17:12) 또한 '왕국' kingdom이다(예: 마 4:8 병행구 눅 4:5; 막 6:23; 계 16:10). 대부분 이러한 모든 구절들에서 세상 나라들은 - 종종 이것이 표현되지 않지만 -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와 대조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 나라들이 "이 세상의 신", 즉 디아볼로스(마귀 devil, → 사단 Satan[마 4:8])에게 예속하는 까닭이다. 마 12:26에는 마귀의 바실레이아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명백히 짐승으로 표현하는 로마 황제에 관하여 특히 사실이다(계: 13:1; → 동물 Animal, art. 데리온).
(b)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공관복음서의 전승 내에서만 중요한 용어이다. 이 표현의 형태는 다양하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데 비해 마태복음은 하늘나라와 아버지의 나라를 말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바실레이아 투 데우라는 용어에 있어서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옛 형태를 보유한다는 증거가 두 고찰에 의해 제공된다. 첫째로, 어록자료 및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하늘 나라 kingdom of heaven)을 언급하는 여러 곳에 이 통상 어구가 나온다(막 1:15; 마 4:17; 눅 6:20 병행구 마 5:3). 둘째로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에 더 오래된 용어인 하나님 나라가 4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마 12:28; 마 19:24; 마 21:31; 마 21:43). 그러므로, 아마 예수께서 오로지 바실레이아 투 데우만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서 사용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를 들면, 마 5:4에서 수동태 파라 클레데손타이("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라는 뜻이요; 눅 16:9에서 복수 "저희가," 곧 천사들이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영접하실 것이라는 뜻이다(참조: 눅 12:20; 눅 23:31). ([편집자주] 그렇지만, 눅 16:9의 "저희는" 재물을 사용하여 덕을 본 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바실레이아가 투 데우라는 첨가 내용 없이 단독으로 사용되는 것에서 이 단어는 그 문맥에 의해 수식된다. 즉, 텐헤토이마스메넨 휘민 바실레이안("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마 25:34; 참조: 마 6:10);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마 8:12; 참조: 눅 12:32; 눅 22:29) 등이다.
(c)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면, 이 선포의 묵시적, 종말론적 성격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다루는 구절들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막 1:15은 간결한 문장으로 예수의 설교의 주제를 기록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참조: 마 3:2; 마 5:7).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가 발견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줄을(엥귀스 에스틴)" (눅 21:31; → 목적, 목표 Goal, art. engys); 이것이 "임하는(에르케타이)" (눅 17:20 → 오다 Come, art. erchomai: 신약성경 3) 등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충성을 고백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참조: 랍비 유대교, 위의 구약성경),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할 것임을 설교하셨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현재의 사건들이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가 불시에 세상에 닥칠 것을 보증한다(마 24:32이하; 막 13:28-29; 눅 21:29이하). 예수께서 하신 재림의 비유가 가리키는 바는 이 예상 외로 갑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침입이다: 갑작스러운 홍수의 임함(마 24:27 ff.; 눅 17:26ff.; →노아 Noah), 예기치 못했던 도적의 침입(마 24:43이하; 눅 12:39이하), 주인이 귀가하는 날에 문지기와 종이 깜짝 놀람(마 24:45이하; 참조: 눅 12:42이하), 신랑의 갑작스러운 도착(마 25:1-13). 이 모두가 재난의 갑작스러운 침입, 즉 짧은 시간으로 앞당겨져 임박한 종말론적 위기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한 묘사들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참조: 마 16:28; 눅 9:27).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아주 임박하였기에 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하고 맹세하셨다(눅 22:18; 참조: 막 14:25). 인자의 재림(→ 현재 Present)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를 채 끝내기도 전에 있을 것이다(마 10:23). 이 언급들로 보아 예수께서 그의 청중의 세대 생전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막 9:1; 막 13:30). (이 해석에 대하여는 → 세대 Generation, art. genea 신약성경; → 현재 Present).
(d) 현재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은 아직 미래이나, 그 임박성이 이미 현재에 그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참조: 눅 11:20). → 귀신 Demons들을 내쫓으심이 마귀가 그보다 강한 자에게 결박되었음을 드러낸다(마 12:29; 막 3:27; 눅 11:21). 유대인들이 말세에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사건인(SB Ⅰ 167f.) 사단 Satan의 축출 사건이 일어났으며(눅 10:18), 예수님의 행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의 현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가운데 in the midst of you) 있느니라" 하고 대답하시기도 했다(눅 17:20이하; AV처럼 "안에 is within you" 가 아님).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엔토스에 관해 Arndt, 268f. 및 거기에 언급된 문서를 참조하라).그 왕국이 이미 출현하였기에 신랑의 친구들은 금식할 수 없으며(막 2:19; 참조: 마 9:15; 눅 5:34), 예수님의 제자들("적은 무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유도케센, 부정과거) (눅 12:32). 예수님에 대한 초기 어록에 따르면, 침례 요한의 출현과 더불어 하나님의 옛 계시 시대는 끝이 나고, 동시에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미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가 "침노(비아제타이)를 당한다"(마 11:12이하; 참조: 눅 16:16). "그 나라를 반대하는 사단과 악령들의 방해, 혹은 요한에 대한 헤롯 안티파스의 폭력으로 추정되나, 로마인들에게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나라를 수립하려는 열심당, 혹은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핍박하는 예수님의 유대인 대적들을 언급함이라는 것이 보다 타당한 설명이다"(D. Hill, The Gospel of Matthew, 1972, 200).
(e)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인성: 실현되는 과정에 있어서의 종말론.
예수님의 종말론을 유대교의 종말론과 비교하면 전자를 임박한 기대의 궁극적 극단으로서 특징 지우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사람들에게 내려질 판결이 그들이 현 세대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해 이미 확정되었다는 예수님의 주장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참조: 눅 12:8).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종말론적 위기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반면에,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은 예수께서 그들 중에서 "권능"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치 않았기에 정죄 당할 것이다(마 11:21이하; 참조: 눅 10:13이하). 예수께서 친히 종말론적 심판주로서 나타나실 것이다(마 25:31). 그는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외면하실 것이요(마 7:23; 참조: 눅 13:27), 그를 시인하는 자들은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마 10:32; 참조: 눅 12:8). 한 인간의 최후의 운명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하여, 환언하면 예수님에 대한 그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된다(마 7:24-27; 참조: 눅 6:47이하). 예수님의 행동과 설교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이 현 시대가 도래하는 심판 Judgment의 날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랍비의 신국관과 비교되는 새롭고 특징적인 요소는 도래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인성과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것이다. 큄멜(W. G. Kummel)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행동이 현재에 종말론적 완성을 초래하셨으므로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앙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시다"(op. cit., 108). 하나님의 미래의 통치가 이미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말씀과 행실에서 현실이 된다. 도래할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의 안에 현존한다. 이 교훈의 해석은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갖가지 다른 명제들을 유발시켰다(종말론적 해석을 보다 상세히 살피려면 → 현재 Present: 신약성경에 나타난 재림과 종말론).
리츨(Ritschl) 학파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를 도덕적 사회를 생성하는 윤리적 태도로 생각한다. 리츨은 묵시적.종말론적 기대를 유대교의 구시대의 유산으로 여겼다. 요하네스 바이쓰(Johannes Weiss)와 알베르트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일관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 또는 "철저한 종말론"(thoroughgoing eschatology)으로 알려진 반대적 견해를 취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는 세상의 끝이 임박하였다는 선포를 그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로 삼음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유대적 묵시와 관련시켰음을 올바르게 지적하였다(A.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10) 19543, 특히 ch. 19 on "Thoroughgoing Scepticism and Thoroughgoing Eschatology", 328-95를 참조하라). 쉬바이처에 따르면, 묵시와 비교되는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뚜렷하게 새로운 요소는 세상의 재난의 임박함이다.
"일관된 종말론"이 제공하는 이 해답과는 대조적으로 영어권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도드(C. H. Dodd)의 영향하에서 "미래주의자 종말론"(futurist eschatology)을 기독교 공동체의 재 유대화의 산물로 이해하여 선포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고, 예수님의 설교에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에 대하여 말한다. 막 1:15을, 추정되는 아람어 원어의 관점에서 도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니 The kingdom of God has come"라고 번역한다(The Parables of the Kingdom, 1935, 44). 이렇게 하여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중요한 요소를 되살린다. 이것은 쉬바이처의 견해와 상반되지만 도드도 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 후 도드는 신약성경 종말론에 대한 그의 이해를 서술하는 방식을 수정하였다. 그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예레미아스(J. Jeremias)의 견해와 비슷한 견해이다(The Parables of Jesus, 19632, 230; 참조: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447).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쉬바이처의 "일관된 종말론"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예수께서 그의 당대의 사람들처럼 장엄한 종말론적 드라마를 기대하셨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Jesus and the Word, 1935, 38). 그렇지만, 불트만은 그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의해 예수님의 신비적.묵시적 미래의 소망으로부터 실존주의적 용어의 참 의미를 추출하고자 시도한다. 그에게 있어 시기에 있어서 미래의 사건인 말세에 대한 기대는 인간이 현재의 순간에서 결단에 직면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따라서 "모든 시간이 마지막 시간이다"(op. cit., 52; 참조: History and Esc hotology, [1957] 1962, 154f.). 불트만에 따르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의 참 의미는 인간에게 결단과 직면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경과함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인간이 회개의 기도나 선행을 통하여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에 그 일들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미래적이기는 하나, 전적으로 현재를 확정하는 힘이다"(op. cit., 51).
이 견해에 맞서 주장되어야 하는 바는 단지 사람들로 회개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매우 임박해 있다는 선포, 그의 전 세계 통치가 막 시작되려 한다는 예고가 있다. 회개와 결단은 그 결과들이지, 임박한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의 실제적 주제가 아니다(참조: 마 3:2; 마 4:17). 묵시적 시간표를 구하는 질문을 예수께서 회피하셨다는 사실이(눅 17:20이하) 하나님 나라 예고의 중심 내용이 실존적 의미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단지 현재의 현실로도, 오로지 미래의 사건으로도 설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미래의 통치가 그의 행동과 그의 인성에 현존하였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는 돌연히 동틀 미래의 그 나라가 이미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서 말하였다. 이렇듯 예수님의 종말론의 성격은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의 표현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된다고 하겠다(E. Haenchen quoted by J. Jeremias, op. cit., 230;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인자의 선포 사이의 관련성에 대하여 →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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