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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에 대해

경건주의 시대의 사상을 물려받은 워치만 니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르친 모든 것들이 다 성경적이거나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전하는 "모든 설교나 가르침, 교리적인 내용"은 성경에 의해 끊임없이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

성경 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며 심판한다.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사상은 마땅히 페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 있다. 

경건주의가 가진 위험성 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 기억하고 듣는다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경건주의 내에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이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그들도 처음에는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후기 저작들에 그들의 체험이 직통계시나 마치 자신들의 신비체험이 특별한 것처럼,

또는 특별한 것을 깨닫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것을 소유해야만 특별한 것처럼 현혹한다.

이러한 자들에게 교만의 영이 역사할 여지가 다분히 많고 또 그러한 저작을 읽는 독자들도 거기에 빠지기 쉽다. 

 

첫번째, 로고스와 레마에 대한 개념이해 : 이를 구분하는 것는 이분법적인 것을 좋아하는 헬라사상에서 유래

두번째, 성령의 조명하심 :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 곧 말씀을 깨닫는 방식

 

첫번째, 로고스와 레마에 대한 개념이해

‘로고스’ (λόγος)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 그 자체, 또한 로고스는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요1:1, 1:14).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 자체를 일컬을 때의 신학적 용어이다.

철학적 용어로는 헬라철학에서는 우주의 이법이다.

즉, 로고스(우주의 이법 : 이치, 원리)가 우주를 존재하게 했고,

또 우주를 운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헬레니즘 철학에서는 로고스는 매우 어떤 추상적이며 이념적이며 비인격적이다.

로고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와 만물이 존재할 수 없고, 운행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비인격적인 어떤 실체나 존재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그것(우주의 이법)"을 헬라철학이 이해하는 비인격적이 어떤 이치나 원리인 이법이 아니라,

너희들은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그 <로고스>는 너희들이 말하는 우주의 실체이며 본질이다.

그런데 그 로고스는 태초(영원)에 있었다.

요한복음1:1 "태초에 '그 로고스'가 계시니라.

그 로고스는 하나님께 함께 계셨고, 그 로고스는 하나님이시니라"(요1:1)에서 밝힘으로

헬라철학자들의 이성의 마당에 폭탄을 떠뜨려 정신이 번쩍 나게 한 것이다.

 헬라철학자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두우며, 눈이 멀어 있는지 아느냐?

너희들이 아는 그 로고스는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가 세상에 오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가 우리를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요1:4)"

그리고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그는 육체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그 안에는 은헤와 진리가 충만하다(요1:14).

그리고 그가 모든 아버지 안에 있는 진리(로고스)를 빛이 되셔서 비추시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리셔서 믿게 하셨다(요1:18)

이것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사 우리에게 나타내시었다.

그(로그스 자체)는 이신 그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성육신).

"그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요1:29,35).

이와같이 사도요한이 로고스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구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러 오신 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아버지의 독생자(유일독특한 아들-완전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사람으로 구세주=그리스도)이심을 설명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는데,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이집트(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하여 2세기가 되었을 때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때 프톨레미 2세가 그 당시의 유대에서 신학자들을 데려와

구약성경을 통일된 국제 공용어인 헬라어(신약성경 기록 언어)로 번역하였는데,

이를 70인이 번역하였다 하여 <70인역(셉투아진트)>이라 명명했다.

구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구약의 히브리어 <다바르(말씀)>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마치 두개인 것처럼 <로고스>나 <레마>로 번역하게 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조차도 헬라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헬레니즘적인 사고로 번역하다 보니 <로고스>와 <레마>로 단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신약을 기록하던 저자들까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나 저자들은 헬라인 독자들에게 쓰여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이 두개로 나누어 기록된 말씀과 들려져서 깨달아진 말씀으로 나누는 것은

이분법적인 헬라적 사고임을 알아야 한다.

말씀은 하나이다. 기록된 말씀도 살아 있는 말씀이고,

그 말씀의 저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으로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에 서양의 인문학은 철저히 헬레니즘적인 사고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기록된 말씀이나 들려지는 말씀이나 모두 하나님 말씀이다.

그 선포자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진리의 전달자이다.

그러나 믿을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깨달아진 말씀이 아니라 들려진 말씀일 때 레마로 번역한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며, 들려진 말씀도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이다.

우리가 구원얻는 믿음의 말씀이다.   

‘레마’ (ῥῆμά)

화자(話者)와 청자(聽者)를 이해하면 로고스와 레마를 구분할 수 있다.

<로고스<와 <레마>로 구분하는 것은 헬라어적 표현으로 이분법적 표현이다.

하나님 말씀듣는 너희를 신이라 하였거늘  

그 말씀(로고스)이 전달자인 선포자에 의해 전달되고 청자가 이를 들었을 때 깨닫든지 못깨닫든지 로고스가 전달된다.

이 때는 로고스이다.

그런데 이것이 청자에게 들려질 때, 청자의 입장에서는 화자가 전해준 것은 말씀 그 자체이지만,

그에게는 들려진 말씀이다.

듣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음이 생길 때 이 때에는 그 말씀은 레마이다.  

두번째 성령의 조명하심

그 말씀(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일 수 있다. 하지만, 기록된 그 말씀을 주신 분은 살아계시다.

그러므로 그 말씀 자체도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것을 깨닫고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선포하여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은 로고스를 듣는 청자들에게 그 말씀이 들려지고 이해되게 하신다.

그래서 그 말씀(로고스)이 청자는 들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로그스와 청자가 들을 때 이해되고 믿게 되었을 때 청자가 듣고 이해되고 믿는 그 말씀(로고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 그 말씀(로고스)이 듣는 자에게는 레마라고 표현한다.

청자가 들었던 로고스가 생각이 떠올라서 그 말씀을 되살릴 때, 기억할 때에 그 말씀을 "레마"라고 쓴다.

뉘앙스가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그 자체라면 레마는 청자가 듣고 깨닫고 이해되고 믿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로그스와 레마는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말씀(로고스)을 내가 깨달아서 내게 주신 말씀(레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듣는 자(독자)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조명(비추어주심)하여 주심으로 <들려진 그 말씀(레마)>이 믿어지게 되어지는 것이다. 

로고스와 레마가 같은 동격이고, 동일한 말씀이지만,

듣는 자가 깨달아지도록 성령의 조명이 있었을 때

마치 무지와 눈멈과 어둠 속에 있던 자가 빛을 보는 것과 같이 진리가 그에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령께서 자연인을 말씀으로 신자가 되고,

신자에게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성령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지식>을 주신다.

말씀의 조명하심은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다.

레마를 들고 설교자가 설교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에게 깨달은 말씀(로고스-레마)가 있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 선포자를 붙드시고 듣는 자를 감화하는 감동이 없이는 말씀이 역사하실 수 없다.

그 말씀의 저자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전하는 자도, 또한 듣는 자들도 성령의 역사하심은 받아야 한다.

 

비신자인 자연인이 성경을 읽을 때 매우 깊은 통찰력을 얻어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성경은 위대한 책일 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단지, 고대의 뛰어난 문서에 불과하다.     

워치만 니는 이러한 성령의 조명에 대한 부분이 없이 마치 우리들이 읽을 때

성경에 기록된 것은 로고스(문서에 적힌 말씀)이고

그것을 읽거나 듣고 깨달을 것이 레마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말씀하신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말씀하신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도 오직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말씀(로고스)와 깨닫게 된 말씀(레마)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둘로 나누려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어떤 특별한 성경의 몇 구절의 말씀을

오늘,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으려는 해프닝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깨달은 것처럼 가장하게 만들고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일에 사탄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말씀(로고스-레마)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조명하여 주셔야만 말씀(로고스-레마)을 깨닫는다.

 

자칫 극단적 신비주의에 빠지면

거기에는 하나님은 없고, 신비적인 것만 남는다. 

자신이 신비에 속한 자로 착각하게 만든다. 

또 그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과 성경을 빙자하여

자신들이 일반 신자보다 더 깊은 직통계시적이고

자신들만 깨닫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영지주의 이단들이 써 먹던 방법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 10:34~36).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정말 그렇게 되는 줄로 알고 엉뚱한 주장한다.
1. ‘너희를’ 신이라 하셨다(34).

    그러나 이 말씀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베드로의 말과 같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다(35).

    이 말씀은 그만큼 너희를 높여 주셨는 말이다.
3. 그러니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그 사람이 신이 된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 되었다.

그러면 사도들(특히 사도요한)은 모두 신인가?

아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그는 진리의 전달자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는 말씀이다. 

*아래의 진하게 표시한 부분과 밑줄 친 부분은 오해하게 하거나 다른 헬레니즘적인 사고로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14권, 제3장)

신약에는 두 개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는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말씀이다. 또 하나는 「레마(rhema)」인데, 성경에는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약간 다르다. 「로고스」는 영원토록 정해진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며,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씀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씀이다. 「레마」는 「로고스」보다 더 주관적이다. 우리는 신약 몇 군데에서 「레마」를 사용하여 설명한 곳을 인용할 수 있다.

마태복음 4장 4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곳의 말씀은 「로고스」가 아닌 「레마」의 말씀이다. 우리가 보통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 의 말씀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느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길에서 차에 치어 상처를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즉시 요한복음을 펴서 읽었다. 우연히 요한복음 11장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즐거워하며 평안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가서 보았을 때에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로고스」이지 「레마」가 아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 말씀은 아닌 것이다. 「로고스」와 「레마」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전자는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후자는 즉석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이곳의 말씀은 「레마」이지 「로고스」가 아니다. 이 말씀의 뜻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말씀하셔야 비로소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말씀은 로고스인데, 들려서 믿어진 말씀은 레마로 변한다. 깨달아진 말씀이 레마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외울 줄 알고 심지어 십 년 이십 년 동안을 외워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고스」이다. 어느 날, 당신은 성경을 읽다가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심을 느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셨음을 느낀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나」임을 느낀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멸망치 않고 「내」가 영생을 얻음을 느낀다.

이것이 「레마」이며 하나님의 말씀하심인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레마」의 말씀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로고스」가 결코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로고스」는 일정한 효용이 있다. 「로고스」가 없으면 「레마」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레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레마)이 되어야 비로소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상황도 변하게 된다.
요한복음 6장 63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없었는가? 있었다.

구약의 계명을 유대인은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소용이 없었다.

오직 주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레마」만이 비로소 영이요 생명이다.
마가복음 14장 72절 :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레마」)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 곧 「레마」를 상기했던 것이다. 「레마」는 그가 기억하고 있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했지만, 홀연히 「레마」 가 왔으며 주님의 그 한 구절의 말씀이 임했던 것이다. 「레마」는 주님이 일찍이 하셨던 말씀을 이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8절 :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여기는 하나님이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아니라 천사가 특별히 마리아에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한 말씀이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능력이 있었고 성취될 수 있었다.
누가복음 2장 29절 :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곳의 말씀도 「레마」이다.

원래 주 예수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므온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네가 주가 세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날 시므온은 주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에게는 주님의 「레마」가 있었으며, 이것은 성경의 몇 장 몇 절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날 주님이 시므온에게 말씀하신 어떤 말씀인 것이다.

단지 성경 몇 장 몇 절의 말씀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만이 비로소 유용하다.

「레마」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만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정결케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레마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은 바로 이것을 의지하는 생활이다.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기독교는 여전히 개인적인 계시의 기독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이 사람 안에서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고 신약도 아니다.
누가복음 3장 2절 :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서의 말씀도 역시 「레마」이다.
누가복음 5장5절 : 「시므온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의 「말씀」도 주님이 즉석에서 말씀하신 말씀이며 주님이 그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레마」이다. 주님이 성경 몇 장 몇 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 14장 29절 말씀을 인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 위를 걷는다면 반드시 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그것이 주님이 오늘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당시에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과 지금 하 신 말씀은 동일하게 능력을 갖고 있고 결코 변함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가이다.
누가복음 24장 8절 : 『저희가 예수의 말씀(레마)을 기억하고』.

무엇이 「레마」인가? 「레마」는 말씀하신 것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레마」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이 거듭하시는 말씀이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11장 16절 : 『내가 주의 말씀(레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고, 주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몸에 임했다. 베드로가 일부러 가서 생각하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우리가 줄곧 소중하게 여기는 한 가지 일은, 주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하심은 멈춘 적이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항상 「레마」가 있기를 소망한다.

만일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때가 많다.

메시지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주님의 일상적인 말씀이기는 하지만 주님의「레마」는 아닌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 없이 죽어 있는 말씀만이 있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부족한채 사람의 전파만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리」 아래 죽어 있으니 얼마나 애석한가.

하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레마」―오늘날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를 주소서.

「레마」가 있어야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레마」이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14권,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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