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학계에 뜨거운 이슈
청교도들이나 개혁신학자들이 신학적 논쟁을 벌였고 결론을 내지 못했던 주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 Christi)과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 Christi)”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 Christi)이라 명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수난 가운데 그 어떤 저항도 없이 고통과 십자가를 감내하신 것만 을 떼어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 Christi)”이라 명명하고 이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것이 논쟁의 시발점이다.
매튜 배럿(미드웨스턴 침례 신학교 기독교 신학 부교수, ‘크레도 팟캐스트’ 운영자)은 브랜던 크로(지음 | 전광규 옮김)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지셔야 했음을 이해하면서도, 왜 예수님이 완전한 삶을 사셔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깊은 통찰력으로 크로는 우리에게 죄 사함이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 구주의 흠 없는 의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하다! 이 책은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시의적절하다. 종종 전가를 부인하는 이때에 크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에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전가가 없다면 소망이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율법을 지키신 행위로 보는 것은 성경적 견해일까?
율법의 수여자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마치 꼭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셔서 의를 획득한 것처럼, 그래서 그의 의를 죄인에게 전가시켜 주셔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과연 신학적으로 옳은 견해일까?
이는 지나치게 율법을 개입시킨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서 의를 전가해 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셨고,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이 의는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인들의 죄 곧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셨고, 그 속죄하심으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사 의롭게 하여 주신 것이다. 그 의는 그리스도의 의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로 그의 부활을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내심으로
그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고, 반감을 갖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결과 무서운 심판과 멸망받아야 함을 알게 하려고 율법을 수여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또한 완전한 사람이다. 죄가 없으시고, 죄를 지을 수없는 하나님이신데,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는 의이시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견해로는 바울의 관점에서 수신자(독자)들을 위해 두 개의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부분을 어떻게 보았을까?
<기독교강요>, 2.12.3에서는 롬 5:12~21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각각 강조하고 있다.
칼빈의 견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눌 문제인가?"
바울이 쓴 로마서의 둘로 나누어 설명한 것에 대해
칼빈이 과연 둘을 각각 강조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한 것이 아니다.
어찌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수동적 순종을 하셔야 한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생애도 능동적 순종이고, 십자가도 수동적 순종이라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학문적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실제로 구원이 둘로 나뉘는 것처럼 두부모 자르듯 나누어
마치 두 개의 구원이 있는 것처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잘못된 용어 선택
이러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는 스콜라주의적 신학으로 종교개혁을 허무는 사변적인 주장일 뿐이다. 능동적 순종으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성취하여서 그의 의를 신자들에게 전가하어 그들로 영생에 이르게 하였다는 그럴싸한 주장은 마치 신약적 근거가 전혀 없고 잘못된 주장으로 교리로 받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논리이다.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율법의 성취(완성)’은 율법의 수여자이신 그리스도,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그가 율법을 다 지켜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의 자체이시다.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려고 애를 쓰시고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행위로서 의"를 얻으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율법의 수여자요 의이신데, 왜 행위적 의를 얻으셔야 하는가?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내용은 마치 "의로우신 예수가 의를 얻기 위해 능동적으로 순종하셔서 의를 얻으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를 얻어 그가 획득한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의롭다 해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해 율법이 어긴 자들에게 요구하는 그 값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음(사망)에 내어 주시고 성취(완성)하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것이다.
서철원 박사는 "모든 신학을 판정하는 것은 성경이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잘 구성된 신학이라고 하더라도 성경의 근거가 없으면 그 신학은 바르지 못하는 신학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폐기처분한다. 능동적 순종 주장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와 지지가 없다. 그러므로 능동적 순종 주장은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639)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로 성경 로마서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두 가지 순종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잘못된 용어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개혁신학자들 사이에 앞다투어 경쟁하듯 논쟁화하고, 교단마다 "이것 옳다, 저것이 옳다"는 결의로 인해 교회 안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서로가 비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불필요한데에 시간을 허비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앞장서는 모양새이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 처사가 아니라 할 수 없없다.
http://www.chptp.org/news/articleView.html?idxno=321 합신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639 합동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3590 고신
http://www.reformednews.co.kr/9493 리폼드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9160 김재성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13 최갑종(종합분석)
바울이 쓴 로마서에서 <구원>을 죄용서와 의와 생명로 나누어서 언급한 것을 가지고
마치 두개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표현(율법 순종=능동적 순종, 십자가 순종=수동적 순종)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고, 감히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로마서를 읽어 보아 바울이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바울이 쓴 로마서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 설명은 수신자(독자)를 위해 나누어 설명한 것
성경을 읽을 때 수신자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성경 구절은 모든 독자(수신자)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있고,
어떤 본문은 적용 대상이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 누구를 독자로 하였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둘 다 의식하고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쓴 목적은 <구원얻는 믿음에 관하여> 쓴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가 두 부류입니다.
그렇다고 따로 따로가 아니라 둘다 동일한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한문장 혹은 하나의 논증(이야기)에서 유대인이 생각하는 구원, 이방헬라인이 생각하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동격으로 설명하다보니 두 개처럼 비추어지고, 두개로 나누고, 마치 다른 것처럼 해석자들이 오해하게 된데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이해를 시키는데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다보니 두 개처럼 보인 것이지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유대)기독교인] = 구약의 아브라함, 율법준수, 제사(속건제와 화목제)
[이방헬라 기독교인] = 오직 십자가의 사건
[히브리인들]
이들이 구원에 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율법과 제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구원은 믿음이며,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사는 용서를 확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일이 없는 사람은 율법이 그를 정죄할 것이 없는 의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순종하심의 의와 십자가의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음을 설명합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느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은 <율법 준수= 의로 여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총체적으로 율법 준수,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완성하심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공로로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 구원을 이루심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물(속건제와 속죄제)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셨다.
[헬라인들]
이들이구원에 관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을 십자가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자신들이 <죄 용서>를 받는가에 관심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죄값을 치루셨다.
십자가로 죄용서를 완성하셨고, 영생과 구원을 은사로 받았다.
통합
바울사도는 구원에 관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과정을 설명>한 후에 이제 하나로 통합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구원은 하나이다.
하나님이 유대인(할례자들)이나 이방인(헬라인=비할례자들)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의 문장 속에 두 개처럼 나누어 설명하면서 독자들의 구원을 설명했다고
그것을 두 개인 것처럼 나누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하나>를 두 관점에서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면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구원)를 설명하려면, 아버지(율법순종)와 어머니(십자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분(율법순종, 십자가)이지만, 두 분에게 나(구원)는 동일한 자식(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따로 있고, 십자가 사건만 별도로 떼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둘로 나누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이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3~5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설명의 과정입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왼발로 뛰어서냐, 오른발로 뛰어서 되었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왼발로 뛴 것은 능동이고, 오른 발로 뛴 것은 수동입니까?
출발점에서 왼발로 시작하든, 오른 발로 시작하든 상관 없습니다.
또한 골인 지점에 왼발로 들어오든, 오른 발로 들어오든지 상관 없습니다.
결국에는 몸통이 들어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구원에 관하여 결론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구원은 하나>입니다.
로마서의 10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얻으며, <오직 믿음으로> 얻을 뿐입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얻으며,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로 이루신 의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