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1)

성경은 이국언어

사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국의 언어와 같습니다.

우리가 낯선 곳에 갔을 때나 혹은 박물관에 가면 옆에서 해설해 주어야 알 수 있듯이 어떤 것은 설명이,

어떤 것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또 들었어도 단번에 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복적으로 여러 번 읽고 들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외국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만 보아서는 알 것도 같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성경이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뉩니다.

창조 때부터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모세 때까지는 구전되어 내려왔습니다.

기원전 1400년 경에 모세가 성경을 처음으로 기록했습니다.

모세가 다섯 권을 기록했는데 모세 5경이라 부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나머지 여호수아부터 말라기까지는 역사서에 해당합니다.

모세 오경에 근거하여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오경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친 말씀입니다.

그림과 글

구약은 마치 그림과 같습니다. 다양한 모자이크로 커다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웅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요약하고 설명(해설, 주석) 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구약 속에 신약이 숨겨져 있고, 신약 속에 구약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짝이 되어 하나의 놀라운 결론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구약만 가지고 해석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그림을 붙들고 지금도 거기에만 매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성경의 구약 가운데 일부분을 가져가 그들의 역사와 이야기와 율법으로 바꾸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천주교)과 정교회는 신약을 왜곡하여 세속화된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의 공동체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고 최상의 복지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져다가 신앙은 빼버리고 사람이 만들자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철저한 인본주의)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이 만든 새로운 이념과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구촌의 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매여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의 주제

성경의 주제는 한마디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대드라마를 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놀라운 역사를 구약이라는 그림언어와 신약이라는 해설집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그 구원은 "창조- 타락- 구속-회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찾아오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완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또한 각 사람마다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주제입니다.
한 때 유행어처럼 던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예'라고 하면 교만한 것 같고, '잘 모른다'라고 하면 잘못된 대답인 것 같고....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라고 하면 교만한 것 같고(뻔뻔한), 죄인이라고 하면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 같고.....
왜 이런 현상이 우리 안에서 일어 나는 것일까요?

대답을 못하는 이유

인간의 관점

정확한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관점과 대답하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질문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해 놓은 답이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질문을 잘못하고 있거나, 정답을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이 틀렸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또, 그가 알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그가 만든 잘못된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의롭다라고 간주한다."
"의인입니까? 의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까?"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은 어떤 부분에서 의인이고, 어떤 부분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신분적으로는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대저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그 사람이 완벽한 의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입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

하나님께 속한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가 자신이 죄인이며 진노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누구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시간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라고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완전한 의인은 천국에 가서 완성됩니다. 

아직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천국에 가기까지 이 땅에서는 긴장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순간, 그들의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육신으로는 <자유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애굽에서처럼 <스스로 노예처럼 생활한다면> 그들은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몸은 자유인이지만, 정신과 삶, 생활습관, 가치관은 노예입니다. 

정신과 삶을 자유인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분명 신분으로는 자유인입니다(구원받았음).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습관이 자유인이 아닙니다(구원받아야 함).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구원받을 것임)

다시 애굽에서처럼 살거나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떠나 살면,

다시 죄의 종(우상숭배)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조차도 구원받았음에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완전함과 온전함

이 세상에 완전한(perfect)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온전하지도 않습니다.

완전은 하나님께만 속한 언어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한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제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타밈'(תמים, tamim)입니다. 

온전함이란 희생 동물이 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신 18:13; 삼하 22:26).

또 하나는 ‘샬롬’인데, 우리말 번역본들에서 ‘평안, 평화, 화평, 평강, 안녕’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ήνη),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 휘기아이노(ὑγιαίνω), 소테리아(σωτηρία),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영어로는 대부분 peace로 번역했습니다.

 "샬롬(שָׁלוֹם)"은 어근 샬렘(שָׁלֵם)에서 파생, 샬렘(שָׁלֵם)은 ‘완전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완전하다는 말은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피조세계는 망가졌습니다.

이러한 망가진 세상을 하나님이 죄인의 속죄(贖罪)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여 가는 것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회복의 시작부터 완성까지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사람간, 국가 간, 거래에 있어서도 사용됩니다.

국가 간 조약으로(수 10:1),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상(출 21:36),

금전 거래 관계에서 부채를 완납(왕하 4:7)했을 때에도 ‘샬렘’이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

이처럼 예수께서 속죄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내가 받은 것은 의로움입니다.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Yes 
그랬다고 "나는 완전한 의인이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 대답이 무언가 온전치 않습니다. 

스스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주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처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의롭게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알고 보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출제문제가 잘못되었으니 정답도 없습니다.  

다짜고짜 당신은 의인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할 단계>를 건너뛴 질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의인이 되셨습니까?

누구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면 답도 명쾌합니다. 

"예, 예수 공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신하가 일백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행한 것과 같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는 늘 고마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왕에게 입은 은혜에 응분(應分, 어떠한 분수나 정도에 알맞음)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다시 왕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딜레마, 의인으로 부름 받은 죄인

이 딜레마를 마음속에 고민으로 가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교역자가 "당신은 의인이요." 그러면 그런 줄 알고, 또 "당신은 죄인이요."라고 하면 죄인인 줄 알고 회개합니다. 

우리는 의인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죄인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제사로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입은 우리의 현주소에서 볼 때는 아직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이러한 것은 시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의인으로 부름 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완전함(천국-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는 거룩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해야 하나님만큼 거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의 공로를 매일같이 힘입어 살면서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온전해지기 위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100이라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어떤 이는 이제 10이요, 어떤 이는 노력해서 거룩하려고 힘써 노력하면서 30을, 어떤 이는 90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부족해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갑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그래도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좇아갑니다.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창세전에 시작하신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주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붙들려 있을 때에만 나는 의인이요,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천국에 이를 때 완전하게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