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출발점 : 나와 저들의 신앙의 차이 무엇인가?
대서양을 건너는 가운데 폭풍우가 휘몰아 칠때마다 배는 전복될 위기에 놓이곤 했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웨슬리를 포함한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 속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였고, 침착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이들은 대답했다.
“두렵기는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스팡겐베르크와 웨슬리가 나눈 대화
어느 날 스팡겐베르크는 웨슬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당신(형제)은 당신 안에 증거를 갖고 있는가?”
둘째,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웨슬리에게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웨슬리는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스팡겐베르크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웨슬리는 잠시 머뭇 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 스팡겐베르크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웨슬리는 이 날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을 그의 일기에 “의미 없이 내맽었다”라고 적었다.
구원의 확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답변해 보자.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무엇으로 그 확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
웨슬리는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스팡겐베르크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보였던 믿음의 확신에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웨슬리는 자연스레 모라비아 교도와 스팡겐베르크에 끌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 안에 <믿음의 확신>을 얻기까지 그들과 계속 교제를 나누었다.
신앙 교제의 중요성
웨슬리는 모라비아 목사 피터 뵐러 (Peter Boehler)를 만나게 되었는데, 피터 뵐러는 웨슬리보다 9년 늦은 17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예나 (Jena)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친첸도르프 (Zinzendorf) 백작 밑에서 신앙 지도를 받은 후 헤른후트 (Hernhut) 형제단에 가입했다. 그는 영국과 아메리카에서는 선교사로 활동했던 경험으로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웨슬리는 뵐러와 영적인 부분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지만, 웨슬리는 그가 하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형제여, 오 내 형제여, 당신은 당신의 철학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Mi frater, mi frater, excoquenda est ista tua philosophia).
웨슬리는 이 말 곧 그 당시 교육에 절대적인 강자이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학문인 "헬레니즘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3월 5일 웨슬리는 병 중에 있던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옥스퍼드에 갔다.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나 대화 중에 웨슬리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 (saving faith)’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장확하게 알게 되었다.
뵐러는 대화를 거듭하며 웨슬리에게 강조했다.
첫째는 <성경으로 돌아갈 것>과 둘째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의 교리 (이신칭의)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 믿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뵐러는 "회개하고 그 믿음 얻기를 구하라"고 말해 주었다.
이어서 "그 믿음은 어느 한순간에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뵐러와의 대화 끝에 자신이 갖지도 못한 신앙에 대해 설교를 그만해야 하지 않나 번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는 “믿음을 얻을 때까지 믿음에 대하여 설교하시오. 그리고 그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얻은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시오.”라고 말해주었다. 다음날인 3월 6일부터 웨슬리는 뵐러의 권고에 따라 믿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3월 말에 피터 뵐러는 웨슬리에게 경건주의적 전통의 방식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성을 설명해 주었다.
드디어 깨닫게 되다
믿음의 본성은 거룩함 (죄로부터의 자유)과 행복 (용서받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열매 맺는 것이며 거룩함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즉 뵐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구원의 확신을 얻게 하는 믿음)을 칭의-법적인 변화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중생-참여적 변화와도 연결시킨 것이다.
웨슬리는 뵐러의 말이 맞는지 살피기 위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웨슬리는 4월 말에 뵐러를 다시 만났을 때는 뵐러가 설명한 믿음의 본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간증을 듣고 “즉각적인 회심”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울부짖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성령으로 외적인 선한 사역을 기뻐한다면, 불신앙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대로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죄를 짓게 하고 육체를 낳으며, 외적인 악한 사역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9절에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믿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모라비안 교도였던 뵐러가 목사였던 <존 웨슬리>를 회심케 했던 질문입니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모라비안 영성에 관해 가르쳐 주었고, 그의 가르침 중에는 사랑, 평화, 기쁨으로 경험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확증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우리들도 자신에게 정직하게 묻고 답해 보자.
"형제님(당신/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이해하십니까?
그분은 만나셨습니까?
그분을 만났었을 때 당신 안에 어떤 일에 일어났습니까?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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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2월 28일, 신학자 · 사회운동가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감리교를 열다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 ~ 1791년 3월 2일)는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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