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말씀요약
구유, 복음의 재발견 (누가복음 2:15~20)
왜 하나님은 《구유》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이 못 박아 놓으시고,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울려 퍼지게 하셨을까?
또, 오고 오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구유에 담긴 당신의 뜻을 묵상하고, 설교하고, 말하게 하셨을까?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하라.
만일 당신이 이것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노래하겠는가? - 마르틴 루터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성경은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중심점은 베들레헴의 구유에 있다. - 랄프 W. 쇼크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시고, 구유에 누이셨던 것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며, 노래해야 할까?
그 첫 번째 이유, "구유, 하나님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7은 강생하신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다.
마구간? 박사들이 찾아간 곳은 마구간이 아니라 집이었다(마 2:11 '집에 들어가')
그 이유는 고대 유대인들의 가옥구조 때문이다. 준 2층처럼 지어서 위층은 주가 공간으로 아래층에는 부엌으로 사용하고, 또 나머지 공간은 짐승들의 우리로 사용했다.
'구유'는 헬라어로 '파트네'(φάτνη, Manger), 히브리어로 'אבוס'(에부스)이다.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7, 12, 16절;13:15)
● 구약성경에 구유 'אבוס'(에부스)는 3번 사용되었다.
1)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אבוס)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2)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 (אבוס) 에 머물겠느냐(욥 39:9)
3) 소가 없으면 구유(אבוס)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 14:4)
성경은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의 놀라운 표징 표적/하나님의 사인) (Admirabile sigrium)이라 말씀합니다.
표적은 세메이온(sign)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때 쓰는 용어입니다.
즉,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누우셨던 구유는 우리에게 '언제나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 구유는 하나님의 표징이며 놀라운《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구유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감탄하고 우리로 놀랄 만한 하나님의 표징으로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어 그것을 관상(바라보고 생각함)할 때마다 언제나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자아냅니다.
그 두 번째 이유, '구유', 복음을 재발견하게 합니다.
구유는 단순히 짐승의 밥을 먹는 "여물통"에 불과합니다.
구유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꼭 나를 오실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오셨으니 잘하셨습니다. 자, 이제 당신의 모습을 보십시오"라고.
구유는 우라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추루한 내 모습, 사실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고 누이셨던 그 구유는 우리 모습 곧 나의 모습이 이었습니다.
구유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는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구유를 바라보며, 구유는 내 모습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유처럼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지저분하고, 관심도 없는 추루(醜陋 :추하고 천한)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거기에 누워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여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존귀한 그림으로 보여 주는 설명인가?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존귀한 사건은 세상에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곳에 보냈고, 그는 오셔서 거기에 계신 것은 임마누엘의 상징적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그 사랑이 한가득 담겨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 어디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신 증거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증표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전에 구유가 있었습니다.
구유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만일 구유가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볼 수 있었을까?
구유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까?
나를 보지 못하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구유는 나의 영적 거듭남의 고향입니다.
세 번째 이유, '구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분명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탄생하시고, 구유에 누이시게 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구유통)에 있든지와 또 구유통 같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나와 가까이 계시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확증하신 표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며 하늘의 만나이신 예수'를 구유에 담아 주셨습니다.
결론, 그러면 이제 구유는 당신에게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유 거기서 당신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거기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거기서 당신은 무슨 고백을 하셨습니까?
지금도 구유는 당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러면 이제 당신이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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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예수가 계시다.
내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시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오늘 이 아름다운 성탄절에 내가 재발견해야 할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