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율법은 무엇인가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토라(תּוֹרָה)라고 부른다. 구약성경의 첫 5권을 모세가 기록했다 하여 모세五經(תּוֹרַת־מֹשֶׁה) 또는 모세율법이라고도 한다(여호수아 8:31; 느헤미야 8:1).
2. 토라(תּוֹרָה, 야라(ירה)에서 유래)의 뜻은 무엇인가요?
'가르침, 교훈, 법, 좋은 것, 혹은 복'으로도 번역되었는데(잠언 1:8; 3:1; 28:4), 토라는 단순한 율법의 조항이 아닌 하나님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부모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과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한다(잠언 1:8; 3:1; 13:14; 이사야 2:3)
“속죄 제물의 법[토라]”, “나병에 관한 법”, “나실인에 대한 법” 등(레위기 6:25; 14:57; 민수기 6:13)이 있다.
3.토라의 주된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들어 있는 규정들(출24:3)은 '~하라'(248가지), '~하지 말라'(365가지), 총 613개 법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중 쉐마(셰마)는 유대인의 신앙 고백이다. 즉,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6:4-9).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가장 큰 첫째 계명”(마태복음 22:36-38)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요약해 주셨고,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다.
황금률(황금처럼 고귀한 가르침)이라 한다.
4. 왜 지켜야 하는가?
이는 억지로가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명령하신 절대적이고, 완전한 법으로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법이다.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해서” 바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 제10장 12-13절)
이처럼 순종을 요구하시며, 그 일부에는 복을 약속하셨고, 또 법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경고하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 1).
5. 누가 과연 율법에 왼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자유와 해방)을 맛본 자들에게 주신 법이다.
각자마다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나는 율법이 요구하는 조항을 다 준수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기에 명한 제사를 통해 자기 백성을 '눈처럼, 양털처럼 희고 깨끗하게' 용서하시고, 하나님 자신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하셨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은혜받고 구원함을 받은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우심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열가지 말씀들인 계명으러 표현되었다. 예전에는 내가 노력해서 지키려고 했다면, 이제는 주님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맨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따라 율법을 바라보자.
그러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억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니다. 도리어 감사이다.
6. 그러나 누가 다 지킬 수 있으랴.
율법을 지킴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신 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다 지킬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릋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도 못하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레위기의 제사법으로 짐승으로 제물을 드려 용서하시는 길을 허락 하셨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 이루시기 까지만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34)이 되셨다.
7. 그리스도가 성취하심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주셨다. 그러나 율법은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 죄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죄가 문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율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전에는 율법을 행할 수 없도록 죄가 우세한 지배력을 가졌으나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 율법이 요구하는 죄값을 다 치루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우세하지 못하다. 죄를 대속하기
하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을 다 알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과 자유, 행복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
또 죄를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이끄시고 지키도록 성령이 도우셨기 때문이다.
자랑이 아니다.
감사이다.
지키게 하시고, 지킬 능력과 지키도록 힘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즐겁게 율법을 지킨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완성, 끝, 마침)하셨다.
율법은 우리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요구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리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곧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에서 형벌 받으신 일은 그리스도께서 억지로 지셨는가?
비자발적이므로 수동적 순종(?)이라 부르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이 우리를 위해 율법을 준수하신 일이 자발적 순종이어서 율법에 능동적 순종이라 부르는가?
어떤 학자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수동적 순종’(‘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담당한 순종’)과 ‘능동적 순종’(‘그리스도께서 전 생애를 걸쳐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을 지킨 순종’)으로 구분한다.
둘 다 가르치는 것이 성경과 전통적인 개혁신학, 특별히 이신칭의와 속죄 교리를 파수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성경적인가?
반면에 어떤 학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수동적 순종만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와 속죄 교리 가르침에 일치하는 정통 개혁신학임을 주장하였다.
성경에 "능동적 순종이라는 말도 없고 수동적 순종"이라는 말도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억지로 나누어서 율법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고, 율법폐기론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1.1. 로마서 서언(1:1-17)
바울은 로마서 1:1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복음의 출처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전부이다. 즉, 아들을 세성에 보내심부터 그의 지상생애와 십자가에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를 포괄한다.
이어 이것을 설명한다. 롬1:2-4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복음>을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가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출생한 것,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전체를 복음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전체의 표제어로 막1:1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한 것과 같다. 즉, 예수님의 출생, 세례, 시험, 제자 선택, 여러 이적과 치유 사역, 여러 비유와 설교,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 수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말하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처럼 복음이 좁은 의미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말하지만, 포괄적 의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포괄하여,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복음서라 명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심은 율법을 완성하심, 성취하심, 능가하심, 복음으로 대치하심, 그리고 값을 치루심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없다.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이기 위한 순종이었다. 그의 순종은 우리의 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다. 나는 여기서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이라는 말을 꺼려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가?
바울은 1:17에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오직 복음(그리스도의 생애 곧 미자막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여기 《복음 안에》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주제어이다.
2.2.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류(1:18-3:20)
2.3.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순종(3:21-26)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3:22)
“믿음으로”와 “믿음을 통하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온 인류(유대인과 이방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칭하는가?
동일한 문단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방편으로 언급된 22절의 ‘믿음-그리스도’ 문구와 26절의 ‘믿음-예수’ 문구는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인 기독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으로서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가?
주격 속격인가? 목적격 속격인가?
롬3:21-26의 중심 내용을 기독론에 두고 있지만, 사실상 3:21-26의 전 내러티브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의》를 계시한 분도 하나님이시고(21, 22절),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24절), 그리스도 예수를 공개적으로 화목제물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25a), 이를 통해 의를 드러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25b, 26a),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26b).
이처럼 3:21-26의 전체 내러티브는 처음부터 끝까지《하나님의 신실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을 말한다.
여기서 전체의 흐름과 배치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진다.
4)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순종(3:24-26)
바울은 3:24에서 현재 수동태 분사 ‘그들을 의롭게 하심으로’를 사용한다. 그래서 3:23에서 말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값없이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과 그가 의롭게 하시는 사역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1:17에서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했지만, 3:24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복음》=《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직접 연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다는 것이다.
① 구속과 화목/속죄 제물로서 십자가 사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말하는 3:24-26절에서 22절에 말한 하나님의 의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설명한다.
② 하나님의 의의 공개적 표현인 십자가 사건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유효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공개적으로 세우셨는가? 바울은 25절 하 반절과 26절에서 ‘공개적으로 세우다’ 동사를 수식하는 세 가지 목적절을 통해 십자가 사건과 로마서 전체의 주제어인 ‘하나님의 의’와 직접 연결을 시킨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런 점에서 (3:21-26), 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거 지신 십자가 사건은 《능동적, 수동적》순종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2.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서 십자가 사건(5:12-21)
로마서 서언에서 하나의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한 것처럼, 하나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양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5:12-21에서 아담의 능동적 불순종 및 그 결과와 대조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 결과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1) 연대성의 원리: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
2)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그 결과
3)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결과
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5:18-19절에서 바울은 이미 15-17절에서 언급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와 그들이 각각 인류에게 미친 상이한 결과를 다시 요약하여 진술한다.
첫째, 아담 한 사람 불순종의 행동은 많은 사람(원문은 ‘모든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의 행동, 곧 그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의롭다함을 가져왔다(18절).
여기 많은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한 아담의 한 범죄, 곧 그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의 행위와 대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는 19절에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병행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을 “생명의 의”로 인도한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는 십자가 이전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의 순종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3:25-26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18절의 “한 범죄”와 19절의 “한 사람의 불순종”이 아담이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먹은 특정한 행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와 평행을 한 18절의 “한 의로운 행위”와 19절의 “한 사람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구체적인 순종으로 보는 것이 옳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5:12-21의 문단에서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생애를 둘로 구분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 이전의 삶을 율법에 대해서는 <능동적> 순종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수동적> 순종인 것처럼 도식화하거나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둘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하였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오히려 죄인이 된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한다(19절).
여기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라는 말을 살펴보자.
이는 18절 하반 절의 “모든 사람을 생명의 의로 인도한다”라는 말과 평행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의인이 되는 것, 곧 칭의를 받는, 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가 전가 되는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칭의는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사죄와 구원을 다 포함한다.
몽학선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주인 몰래 종종 주인의 아들을 괴롭혔던 ‘소년 인도자’를 지칭한다.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호소한다.
"주여, 내가 어찌 하여야 하오리이까?"
탄식하며 부르지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로마서 3:20의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와도 부합한다.
바울은 로마서 5:20하 반절에서,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여 수술이 필요한 환부를 들추어내어 수술실로 안내하는 것처럼, 죄의 심각성을 폭로하는 율법의 부정적 역할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풍성한 은혜의 필요성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21절은 5:12-20의 총 결론이다.
이 결론적인 구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그가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한 사람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결과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결과를 서로 대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비교할 수 없는 우위성을 재강조한다.
아담 한 사람 불순종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
죄는 모든 사람을 노예화하여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신격화시키고 그것에 복종하는 종노릇을 하게 한다.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사망과 심판을 자초하게 한다(1:18-3:2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3:21-26)는 우리를 의의 지배 아래 두게 하고, 우리를 의와 영생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전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간다.
첫 사람 아담으로 대변되는 첫 창조와 타락, 그리고 마지막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새 창조와 구속은 인류 역사와 전 피조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다.
여기서 거듭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을 통해 나타난 죄의 세력보다 더 크고, 더 풍성하고, 더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 곧 온전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동시에 인류가 율법을 어겨 죄와 사망에 빠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심으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과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성취한 그 사랑을 구현함으로써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그리스더의 생애를 십자가 이전의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 사건의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하지 말이야 한다.
십자가 사건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생애 전체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복음서는 전체를 보여주고 있지, 우리로 나누고 구분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완성(테트레스타이)이다.
우리 말 성경에 "다 이루었다! "고 번역된 말은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가상7언 중 6번째로 하신 말이다.
이는 주님께서 마침내 모든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심을 알리는 신적인 선포이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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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그리스도의 순종,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 코람데오닷컴
1. 들어가는 말지난 1, 2년 (2021-2022) 동안 정통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국내 조직신학 및 교회사 교수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있었다. 어떤 교수는 그리스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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