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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시간의 창조, 그리고 종말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1, 28, 31)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이며 증거인가?
창세기는 하나님에 의해 비로소《태초에 : 시간과 공간의 머리에》 공간이 창조되고, 또 시간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베레쉬트(בּראשׂית, 태초에, In the beginning)
전치사(בּ, ~안에)+ 로쉬(ראש,  '처음, 시초, 태초, 맨처음, 시작, 머리, 으뜸, 근본')
태초에는 하나님의  '시간의 시작' 혹은 '어떤 장소의 처음에'를 의미한다.
헬라어로는 '엔 아르케'(έν ἀρχή)로 번역했다. 요한복음 1장1절과 요한 1서1장1절에 "태초에"로 번역되었는데, 창세기1장과는 다르다.
"태초에"라고 동일하게 기록되었으나 의미는 다르다.
창세기기 1장1절, "태초에"는 창조의 시점을 강조한다. 시간의 창조요, 모든 만물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1절과 요한 1서1장1절에 "태초에"는 시간의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신 창1:1보다 앞선 그 시점으로 "영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성
영원하신 하나님은, 지음받은 시간 그 너머에 계신다. 그에게게 시간은 "영원한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에 의해 우주와 만물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고, 피조된 시간의 시간이다.
그렇게 창조된 공간과 시간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의해 천지창조로 비로소 시간이 창조되었고, 그 시간의 출발점이 태초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공간이나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또 그 공간 안에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시간 안에 섭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공간 안에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운행하신다. 그럼에도 땅 위에 피조물을 다스릴 통치자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시간을 통해 온갖 다양한 변화들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며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하셨다.


1.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

일반적으로 우리는 변화를 통해 시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개념을 이해하고자 시도한 자연철학자들, 그리고 이어서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낸 철학자들의 탐구를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멈추어(?) 있는 시간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무어라 정의했는가? B.C 5세기의 소피스트의 시조인 철학자 제논(B.C 490경~ 430경)은 '운동하는 것은 그것이 운동하는 장소에도 없고, 운동하지 않는 장소에도 없다.'라고 했다. 이를 증명하려고 도입한 것이 "날아가는 화살"이다.
우리가 보는 날아가는 화살은 운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나누고 가장 작게 쪼개어 보면 매 순간 공간 안에서 정지해 있다. 날아가는 순간순간 화살은 정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순간순간의 시간을 더 해도 화살은 멈추어 있는 것이므로 결코 날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움직이며 흘러가고(?) 있는 시간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중대한 결함은 무엇인지 찾아보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는 그의 저서 '자연학(Physica)'에서 시간에 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시간은 운동의 전후에서의 수(number)'이다. 시간은 운동이 일어나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운동이나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없다."
여기서 운동이란 사물의 변화를 일컫는다.
제논의 허무맹랑한 주장의 결함을 밝히는 데는 이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절대 시간
17세기에 이르러 진자시계가 발명되면서다. 시간의 개념을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과학자는 바로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1642~1727)'이다.
1687년,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절대 시간(Absolute Time)'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주창했다.
뉴턴은 변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절대 시간',  운동과 상관없이, 물체가 있든 없든,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시간은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 개념을 '절대적이고 참된 수학적인 시간은 그 스스로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외부의 어느 것과도 무관하게 일정하게 흐르는데 이에 대한 별명을 《지속》이라고도 한다.'고  정의했다.
이러한 뉴턴의 '절대 시간'에 대한 반론(라이프니쯔)도 있었으나, 오랜 시간 동안 절대 시간의 개념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시간은 절대적이고 고정적으로 일정하게만 흐르는가?
어떤 상황에서는 신축적이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나타났다.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26살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뉴턴 역학'을 대신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근접하면 시간의 속도는 느려지고,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춘다는 것이다.
1916년, 그는 또
중력에 의해서도 시간이 느려진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 사실을 밝혀냈다.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놓인 시계와 해발 0m에 놓인 시계는 똑같이 흐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지구의 중력으로 인해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시계가 해발 0m에 있는 시계보다 100년에 300분의 1초가량 빨리 가는 것으로 계산된다.
이처럼 시간이 고정되고 일정하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시간의 보정이 필요한 것이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같은 공통의 시간인 정시를 갖게 해 주는 《표준시계》를 통해 보정해야 한다.
지구에서는 태양과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을 통해 시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어떠할까?
시간의 앞 뒤가 있을까?
해가 뜨는 시간이 시작일까?
해가 지는 시간이 시작일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일까?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 1:13)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שְׁלִישִׁי׃ ף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a third day.”

시간 개념들
이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즉, 어느 쪽이 과거이고 어느 쪽이 미래인가?
직선사관
우리는 경험을 통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 과정(irreversible process)- 직선사관'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 한다. 존재하지는 않지만, 타임머신을 생각해 내거나, 시간이 역으로 흐를 수는 없는가를 상상하게 된다.
나선형 사관
직선형과 나선형 등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나 제약을 벗어나려 한다.
윤회사관(輪回)
우리는 의식 안에서 기억이나 기록 안에 있는 사건을 '과거'라고 생각하고, 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현재-미래' 에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의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 1889~1953)'에 의해 우주에 대한 이전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우주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후로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지구 나이를 추정한 것이 대략 138억 년이다. 이론적으로 138억 년 전에 우주 전체는 매우 작았을 것이다. 그 시점이 '빅뱅(big bang)'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시작이다.
시간이 먼저였을까? 공간이 먼저였을까?


공간과 시간의 관계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가 성립된 것이다.
만일 우주라는 공간을 창출한 빅뱅을 우주의 시작으로 간주한다면, 우주인 공간이 먼저 시작되었고, 또한 그와 동시에 혹은 뒤에 시간의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표준적인 우주론'의 입장이다.
그러면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은 무엇이었을까?
빅뱅이 일어나게 만든 에너지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빅뱅 이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단지 시간적으로 빅뱅은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표준적인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모두 '연속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1968년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에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가 있다고 주장한 물리학자가 나타났는데,  일본의 최초의 물리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그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의 영역이 있다는 '소영역론'을 발표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최소 단위는 너무나도 작아서, 우리에게는 시간이나 공간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과학(물리학)이 풀어내려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주의 시작을 선언하면서 우주의 탄생이 "말씀(하심)- 가라사대"로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한다.
바로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물의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성경은 영원이라는 시간 안에서 우주와 만물이 먼저 존재하고, 그 피조물과 관련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유익한 통찰을 얻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는 없단 말인가.
우리는 시간 안에 살고 있고, 시간을 통해 경험하고 그 시간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며,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어떤 정의가 내려졌다 해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안에서 통용되는 정의일 뿐이다.
이처럼 어떤 것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어떤 것은 인간이 밝혀내지 못했으나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
생물학에서 '생명(Life)'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것이 생명이다라고 명확하게 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것은 너무 광범위하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작아서 제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물리학 역시 '시간(Time)'이라는 개념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물리학자들조차도 '시간(Time)'이 뭔지 아직은 모른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시간'에 대해 묻는다면 그 시대에 통용되는 달력과 시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시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 한다면, 그 누구도 '이것이 시간이다'라고 대답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단지 경험을 통해 흘러가는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한다. 이는 현재라는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한계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정의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두 가지 시간이 있다.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¹
크로노스(Χρόνος)
우리들은 순간, 순간의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과거-현재- 다가 올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소 길거나 짧을 수 있지만, 모두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크로노스(영어에서는 chronicle : 연대기)라 불리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절대적이고 불가역적 측량이 가능한 물리적 시간이다. 객관적 시간,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 자연적 시간이다. 해가 뜨고 지고, 춘하추동이 찾아오고,  동식물이 탄생하고 늙고 죽어가는 시간이다.

카이로스(Καιρός)
그 시간, 거기에서 나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기회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은 질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 시간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그들만의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다. 때로 《그 순간, 그 시간》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회의 시간>이며,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결단의 시간>이기도 하다.

인생에 최고의 깨달음, 영적인 변화는 카이로스이다.
하나님을 만난 시간은 카이로스다.
깨달음을 얻은 시간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에 끌려가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만들며, 보다 나은 인격적 성숙과 발전을 위해 사용하라.

카이로스(기회의 시간)를 찾아가라.

우리의 생애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무미건조한 목표를 좇는 사람에게 카이로스가 주는 기회는 없다.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설정하라.
그리고, 설정한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사명자로 살자.
목적이 있는 삶,
비전이 이끄는 삶,
그래서 활력과 재기가 넘치는 하루하루,
자신의 비전을 주변 사람과 공유하며
서로 독려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분명 카이로스는 찾아온다.

성경은 두 가지 시간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분명 역대기를 족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크로노스를 기록하면서도,
또 거기에 찾아가시고 만나주시고 도와주시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드시는
카이로스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시간을 움직이는 동시에, 또한 특별한 역사(성경의 역사)로 믿음의 사람을 찾아가셔서 그에게 섭리하시면서 도우신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같이 전능자에 의해 피조된 세계는 낮과 밤, 그리고 사시(봄 여름 가을 겨울)와 우리들이 사용하는 달력과 날과 시간을 구분하게 되어 시간이 흘러가게 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계절)와 일자(날)와 연한(해, 년)이 이루라” (창 1:14)
이같이 흘러가던 시간도 언제가는 마치는 날이 온다. 영원에서 태어나 유한 속에 머물다가 다시 영원에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재창조로 모든 만물이 비로소 영원의 새옷을 입게 된다.
계 21:1, 5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참조
¹. * 크로노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티탄 신으로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자신의 누나인 레아(대지의 신)와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3남 3녀들이 헤스티아(순결한 부뚜막 여신), 헤라(제우스의 아내), 데메테르(대지의 신), 포세이돈(바다의 신), 하데스(지하의 신), 제우스(지상과 하늘을 다스림)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지위를 자식에게 모두 잃는다는 신탁을 듣고,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거세시킨 후에 우주의 지배자가 되고,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모두 잡아먹어 버린다. 결국, 가이아의 도움을 받은 제우스가 아버지가 삼킨 형제들을 모두 구해내고 최고신에 등극하여 하늘과 지상을 다스린다.
크로노스에게는 모든 것은 늙고 죽어간다는,
즉 시간의 흐름에 모든 생물이 잡아먹힘을 당한다
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신화이다.
* 카이로스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며 기회의 신이라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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