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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를 알았던 철학자들

데이비드 흄(1711~1776년)은 그의 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이성을 ‘정념(情念)의 노예’라고 했습니다.

  * 정념(情念)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지어 놓고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는 데 쓰이니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경험론자였던 데이비드 흄이 찾아낸 결론은 그보다 2,400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성을 단순하게 보면 《생각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 마음에서 움직이는 정신적인 활동들의 총집합체인 이성에 대해 알아보자.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한다.
인간의 이성 곧 마음의 <생각과 판단>으로 행위를 한다.

행위(行爲)란, 사람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짓
(윤리) 분명한 목적·동기를 가지고 사려·선택·결심을 거쳐 의식적으로 행하는 인간의 의지적 언행. 윤리적인 판단의 대상이 됨.
법률상의 효과 발생의 원인이 되는 의사(意思) 활동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별개가 아니다.
이성은 판단력과 분석으로 어떤한 것을 결정하고, 이를 의지에게 전달하여 그대로 실행한다.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곳은 《마음》이다.
마음은 건물을 지을 때 거푸집(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집어 넣든지 거기에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그 것이 생각이 되어 의지로 표출된다.
만일 인간의 마음이 오염되고, 기울어져 있다면 그의 생각과 행위도 또한 기울어져 있다.
마음이 삐뚫어면 비탈길로 내려가듯 행위가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처럼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이성의 판단력으로 의지가 작용하여 행동을 만들어 내는데, 그 마음이 부패(내적 활동) 했다면 그 결과로 인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외적 활동)는 당연히 부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같이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더 교활(속이는 간사함)하여 치유될 가망이 전혀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모두 살피시고,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를 심판하시나니"(17:9-10)
좀 더 풀어서 쉽게 번역해 보면 "사람의 마음은 세상 어떤 것보다 비탈진 기울어진 길을 따르니 도무지 《
고칠 수 없는 중병》이 들었거늘, 누가 그렇다는 것을 알겠는가?"
선지자는 악한 행위들이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그 마음이 부패(내적 활동)했기에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외적 활동)는 당연히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부패하게 되었는가?
그 가장 중요한 마음이 외부 바이러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음을 속이는 교활한 것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창조자이신 신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주셨으나 부패하여져서 신을 아는 기능이 무능해졌다.
서실 인간을 알면 신을 알게 되고, 신을 알면 인간을 알게 되도록 되어 있었다.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이라도 하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음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악에 이끌리어) 교활한 상태, 부패한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성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
이성으로 인간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자신과 창조자인 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인간을 알면 신을 알게 되고, 신을 알면 인간을 알게 된다.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이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음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서로 맞물려 있다.
인간이 신을 떠나면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으로 자신을 위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되어) 사용하므로,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부패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이성으로 알기를 원하는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신(하나님)의 영역을 알고 싶어하는 이성의 욕망은 어디까지 알아 갈 수 있을까?
신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고,
인간은 그 이성으로 신을 알기를 원한다.
신의 영역은 도구가 없이는 이성으로 도무지 알 수 없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만 인간 자신의 존쟈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알아가게 된다.
인간의 이성은 철학, 음악, 미술, 예술, 과학, 수학, 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들을 통해 매우 유용한 것들을 찾고, 발견하고, 깊이를 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은 참된 신학과 참된 신앙이라는 도구 를 통해서만 깨달으며 신존재를 참 되게 인식하게 된다.

이같이 이성의 선물을 통해 인간은 《안전선》을 넘지 않는다.
지혜로운 이러한 인간의 이성의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고 인정한다.
그러나 종종 어떤 이들은 그 이성으로 넘지 말아야 할 영역을 넘으려 한다. 그들이 생산해 낸 지식들은 매우 탁월한 듯 보이고, 때로는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매우 큰 불행한 것은 이성이 때때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이 양날의 칼과 같다는 이유이다.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유익을 주지만, 이성이 인간을 스스로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되어 놀이로 던졌지만, 개구리에는 생사의 딜림에 있듯, 인간이 이성으로 생산해 낸 지식이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으로 인간 자신을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먼저 그 이성의 주인인 인간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 자신만 가지고 이해할 수 없어 주변의 사물들을 가져와 설명을 해야 한다. 동물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것이다. 그러면 대상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 인간을 알기 위한 어떤 비교의 대상도 없다. 어찌 인간을 이성없는 동물에 비교하리요.
그런데, 인간 존재 안에는 이미 자신을 알만한 것들을 심어 주셨다. 또 추리로 알아가는 기능과 능력이 심겨져 있어 정신적인 활동으로 그 비밀을 풀어가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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