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보았을까? 영국의 경험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년)은 그의 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이성》이란 ‘정념(情念,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의 노예’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지어 놓고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는 데 쓰이니 (그래서)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경험론자였던 그가 찾아낸 결론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을 볼 때 그보다 2,400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면 인간의 이성은 무엇인가?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별개가 아니다.
이성의 결정을 의지는 작용한다.
철학자들은 마음보다 이성에 관심을 두고, 철학을 했다. 이성의 활동들도 마음을 떠나서 작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분할 수는 있다.
이성에 대한 정의들
1. 이성(理性, reason)이란 인식된 이것저것의 지식을 보다 소수의 원리로 통일하는 힘
2. 칸트에게 있어 이성은 '도덕적 능력인 실천 이성에 상대되는 것으로 이성의 이론적 측면, 곧 인식을 주로 하는 능력이나 생각'
3. 한자로는 心中有心(심중유심), 마음속에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4.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 때 좋은 뜻으로 이야기하면 분별력이 뛰어나거나 판단력이 좋은 사람.
5. 이성적 능력은 자율적으로 자기의 행위를 결정하는 능력
6.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는 능력
7. 철학에서 '이성'은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 라틴어로 '라티오'(ratio)이다. 이 단어들은 인간의 '말하기'와 '사고능력'을 그 기본적 의미로 갖고 있다.
8. (철학) 어떠한 척도와 기준을 두고 분별력을 토대로 참·거짓, 선·악 따위를 판단하는 능력.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9. 우주 또는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원리, 진리, 로고스. 세계의 진리를 아는 힘 등
10. (나의 정의) 인간의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이다.
철학자들의 알아낸 것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트는 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로 추론으로 통해 물자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인간이 순수한 이성이라면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으나, 그 순수함을 가진 인간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결론 내린 것을 해명하고 풀어보려고 이성을 사용한다던 데이비드 흄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의 바탕에 무엇이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도달하는 결론은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떻게 하더라도 물자체인 사물의 본질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의 한계이다.
☆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 또는 누메논(Noumenon). 칸트철학의 기본개념으로, 감각의 사용과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사물 또는 사건을 말한다.
인간이 정말로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
인간이 이성으로 알기를 원하는 영역은 무엇이며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신(하나님)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이성의 욕망은 어디까지 알아 갈 수 있을까?
신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고,
인간은 그 이성으로 신을 알기를 원한다.
과학적 탐구에도 도구가 필요하듯, 신의 영역은 도구가 없이는 이성으로 도무지 알 수 없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만 성경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구조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성경은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간 자신의 존재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을 《부분적으로만》 알아가게 된다.
인간의 이성은 철학, 음악, 미술, 예술, 과학, 수학, 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학문들을 통해 매우 유용한 것들을 찾고, 발견하고, 깊이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더 신비한 것은 인간 자신이며, 또 신의 영역이다.
이것을 풀기 위해 노력했던 최초의 철학자는 누구였을까?
그 신비의 영역,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고 했었 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
그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수학 속에서 찾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종교와 과학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였다.
이들은 자연세계에서 수학적 원리들을 찾아냈고, 이는 자연세계를 이해하는데 독보적인 방법으로 수학을 이용했다. 그들이 찾아낸 것들을 오늘날 우리는 수학시간애 배우고, 또 실생활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들에게 수학은 신의 영역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수학은 학문이자 과학이고,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신앙이었다.
중세 말엽, 근대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기술은 급속히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인 원리 탐구도 발전하게 되었다.
과학은 역사적으로 신의 존재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우주의 기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을 풀어서 쉽게 설명한 것이 성경이다. 특히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 중 하나인 '요한복음'의 서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왜 요한은 그가 알았던 예수를 설명하는데, 헬라어 '말씀'(logos, 로고스)라는 단어를 차용했을까?
당시 헬라문화권에는 상당히 발전된 학문과 철학, 신화들이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단 한 문장으로 화두를 던졌다.
그는 모든 헬라철학자들을 과히 까무러칠 논법으로 증명해 나간다.
먼저 《구약성경》의 첫 페이지를 보자.
“빛이 있으라"라고 신이 명령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저자는 창조의 세계와 그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피조의 세계를 창조하실 때 바로 설계도가 있었다. 그 설계도에 따라 창조하는《원리》가 있었다.
피조세계를 자연이라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노시스 - 신의 카드를 뒤집은 인간 -
미타 마사히로 저 | 다른세상
적어도 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하기 이전에 그 시스템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시초는 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명령한 순간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신의 소리에 대응해 빛을 내는 원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말씀(원리)이 계시니라 인 것이다.
신의 정체는 원리다.
'요한복음의 서두애 진술한 내용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이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의 논증은 이것이다. 과학자가 본 요한의 진술을 좀 더 살펴보면 과학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즉, 최초에 원리가 있고 다음에 신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말(씀)과 신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지적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요한은 바로 《원리 (말)》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이 매력적인 말을 서두에 내건 것이 다른 세 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요한복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견해를 서두에 내세운 것은 요한뿐이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는 이런 내용을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네 복음서 중 요한복음은 특별한 존재다.
그 이유는 저자가 요한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요한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피타고라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비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역시 저자는 요한복음의 서두의 진술을 자신이 쓰려는 이 책을 위해 적절한 인용으로 사용 뿐 나머지는 단 1도 관심이 없다.
그는 과학 역사와 기독교 역사 사이에 관련된 내용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반나절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기존에 알고 있었으나 잘 정리가 안되었던 것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노시스』는 역사 속에서 과학과 종교가 이어온 독특한 관계의 흐름을 읽으며, 그에 얽힌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드라마틱하게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목차
프롤로그 - 가톨릭과 과학은 하나였다
1장. 황금비가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 피보나치수열
- 13세기에 피보나치가 출판한 산수책
- 증식하는 토끼에 관한 기묘한 문제
- 황금비란 무엇인가
- 자연은 황금비로 되어 있다
- 자신의 예술에 황금비를 활용한 다 빈치
2장. 삼각형의 불가사의 - ‘수의 신비’에서 신을 본 피타고라스
-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한 삼각형
- 비밀의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계의 신비
- 행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
- ‘무리수’는 왜 사악한가?
- 최초로 지구를 ‘둥근 물체’라고 주창한 피타고라스
- ‘신의 진리를 인식하는 그노시스’로의 흐름
3장. 다 빈치와 예수 그리스도 - 예수란 어떤 인물인가?
- 다 빈치가 그린 <암굴의 성모>에 얽힌 수수께끼
- 세례요한이 세례를 시작하다
- 《구약성경》을 충분히 공부한 예수
- 몸을 희생해 맺은 신과의 계약
-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
- 세례요한 처형의 진상
- 예수의 쌍둥이란 누구인가?
4장.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에 숨겨진 수수께끼 - 로마 가톨릭이 지배한 중세
- 사해문서로 밝혀진 에세네파의 전모
-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의 공통점
- 에세네파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요한복음
- 다 빈치가 <암굴의 성모>에 담은 의도
- 십자군에 문화적 충격을 준 그리스정교
- 희생양과 죄의식
- <최후의 만찬>의 참모습
5장. 수수께끼로 가득 찬 다 빈치의 생애 - 천재는 혼자 조용히 인식한다
- 가톨릭의 억압과 인식으로의 갈망
- 삼위일체를 부인한 유니테리언
- 부친을 혐오한 다 빈치
- <최후의 만찬>은 인물보다 원근법이 우수하다
- 시체를 해부한 다 빈치의 목적
- 다 빈치는 인식하고 있었다
- 영화 <다 빈치 코드>의 오류
- 막달라 마리아는 <암굴의 성모>에 그려져 있다
6장.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발견 - 가톨릭적 세계관에 대한 첫 도전
- 대성당의 샹들리에에서 발견한 ‘흔들이의 법칙’
- ‘중력의 법칙’을 확립한 갈릴레이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회전’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 천체 관측으로 지구의 회전을 확신한 갈릴레이
- 파리의 움직임에서 ‘해석기하학’을 발견한 데카르트
7장. 근대과학을 확립한 아이작 뉴턴 - 로마교황도 인정한 ‘만유인력의 법칙’
- 다 빈치, 갈릴레이, 뉴턴을 연결하는 시계
-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 신학과 근대과학의 지위를 역전시킨 뉴턴
- ‘미적분’을 발견한 것은 뉴턴인가, 라이프니츠인가?
-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상에 알린 핼리
8장. ‘유일신의 영역’을 목표로 한 과학자들 - 다 빈치와 뉴턴을 연계하는 ‘인식’의 욕구
-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유니테리언
- 가톨릭을 초월한 신과의 일체
- ‘신의 첫 일격’으로 종교와 과학은 대립하지 않는다
- 뉴턴의 문제를 해결한 라그랑주
- 물리학 역사상 최고의 천재, 피에르 라플라스
9장. 신의 영역의 종말 - 인류가 이뤄낸 인식의 도달점
- 원리의 한계를 가르치는 ‘불확정성 원리’
- 신도 인간도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것
- 신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빅뱅’은 왜 일어났는가?
- 천왕성을 발견한 허셜
- 그리스도교의 대들보를 흔든 대사건
10장. 신의 비밀에 대한 으뜸패 - 천재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전자
- 다 빈치와 뉴턴도 알아차리지 못한 ‘전자’의 존재
- ‘화학’, 그 끝없는 미지의 세계
- 천재들이 ‘전자기’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
- 어떻게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
- 전파와 빛이 같다는 놀라운 사실
- 뉴턴 역학을 수정한 아인슈타인의 공적
에필로그 -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30세 이후에는 치통으로 고생한 밤을 제외하고는 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천재였던 파스칼, 그에게 치통은 과학 역사상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파스칼이 본격적으로 물리학을 연구했더라면 어쩌면 뉴턴보다 먼저 위대한 발견을 했을지도 모른다.
파스칼 사망 후 방대한 노트가 발견되어 조카에 의해 그것을 출판되었다.
이것이 철학사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팡세 Pensees(생각하는 것)》이다.
그중 아주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 (thinking reed)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바람,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그는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주'는 신이 창출한 우주며, 신 그 자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우주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 할 수 있다. 생각함으로써 인간은 우주를 포용한다.
즉 인간은 우주보다 큰 존재인 것이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천재 철학자, 그는 이 짧은 글에서 그의 "생각하는 이성의 힘"에 관한 사유를 토해냈다.
사실 이 글의 내용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고, 이해하는 것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쨌건 '인간이 한낮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한 사람이 태산 앞에서 철학과 과학, 이성을 도구로 끊임없이 태산을 알아가고자 노력한다. 그가 떠나고 다음 세대가 또 그 일을 하고, 이어서 다음 세대가 그 일을 반복하지만 여전히 태산은 그들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그 일을 하는 철학자들은 태산을 이야기 한다.
태산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겸손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