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종'(δοῦλος, 둘로스)은 ‘노예’인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이 종이 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그는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종(둘로스)’과 같이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종이 아니라 《노예》가 되셔서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이 땅에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던 것이다.
우리가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노라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피를 뚝뚝흘리고 계시는 모습,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운명하시는 그 장엄한 장면을 누군가가 생중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생중계는 십자가의 사건이 있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이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사야가 증거하는 말씀에 ‘그’에 ‘예수’를 넣어 읽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사야 52장에서도 그 메시아를 종이라고 일컫고 있다.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그런데, 그는 사람의 종이 아니다.
'내 종' 곧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그 뜻을 성취할 거룩한 종이다.
구약성경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졌다(신 34:5; 수 24:30; 삼상 3:10; 겔 34:23).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렘 7:25; 25:4).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에게 소속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신 32:36; 사 49:3;63:7; 렘 46:27).
여기서 우리말로 '노예' 혹은 ‘종’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עֶבֶד(에베드)이다.
70인경(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 헬라어로 70인이 번역)에는 עֶבֶד(에베드)를 δοῦλος(둘로스)로 대부분 번역하였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노예가 무엇인지 가장 잘 묘사되어 있는 부분은
시편 126 :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Nabucco)〉3막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다니엘서의 바벨론 포로생활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노래로 만든 것이지요.
"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가라, 내 상념이여(Va, pensiero, sull'ali dorate)"이다.
고향을 그리며 부릅니다.
팝송 '바빌론 강가에서(By the Rivers of Babylon)'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팝 버전에 해당하는 곡이다.
일반적으로 ‘에베드’(ebed)라는 히브리어로, 노예를 일컫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고된 강제노동을 해야만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종"이라고 지목한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아"이시며, 고난 받는 노예이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인의 명령을 묵묵히 따라야만 하는 노예처럼, 그리스도께서 묵묵히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멸시천대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것이다. 노예처럼 채찍에 맞을 것이며, 또한 노예처럼 무시당하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당할 것이다.
그의 얼굴은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그는 죄조차 알지 못하면서 아무 죄도 없음에도,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아무 변명도 못하고 변변한 저항조차 해 볼 기회도 없이 그저 묵묵히 온갖 고난을 다 받아들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종은 모두 노예를 말하는가?
종과 노예의 차이
고대사회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빚을 갚지 못하면 종으로 팔려갔다. 빚을 다 청산할 때까지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빚을 다 청산하면 자유인이 된다. 그러므로 종은 영원히 주인의 재산이 아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지만 흔하지는 않았다.
보통 전쟁 포로로 잡히거나(민 31:7-9) 부모가 노예였거나(출 21:4), 노예로 팔리는 경우 노예가 되었다. 유죄선고를 받은 도둑이 배상하기 위해 노예로 팔릴 수도 있었다(출 22:3)
구약시대에는 종은 이와 같이 빚 때문에 종이 되었지만, 희년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주인이 또한 자유케 해 줄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식으로 입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예가 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발적으로도 노예가 되기도 하고, 신분적으로 태어나면서 부터 노예인 경우도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종》은 어떤 의미인가?
신약 성경에서 그분은 주인이요, 소유주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왕,
만유의 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종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분의 《노예》들로 그의 영원한 소유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주종 관계로 보이지 않을까?
그 이유는, 대다수 영어 번역본들의 오역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노예'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עֶבֶד(에베드)를 70 인경(구약 헬라어 성경)에서 헬라어로 δοῦλος(둘로스)로 대부분 번역하였다. 영어로 성경번역을 하면서 slave가 아닌 servant(종)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공통점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종'은 고용된 존재(삯꾼-품삯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 '청지기도 이에 속한다)이지만, '노예'는 주인에게 소속된 소유된 존재라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노예는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주인은 종에 대해 생사여탈권 같은 것은 가지지 않았다. 종은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는 노예라는 신분을 갖고 태어난다.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한이나 권리도 없다.
재산을 소유할 수 없으며, 아무런 자유도 없다.
이처럼 노예와 종은 이렇게 다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노예를 종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왜 그랬을까?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이렇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나도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까?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나 바울은...”
우리는 이미 번역 성경을 통해 '종'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진 나머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종(사람)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원어 그대로 "하나님이 《노예》가 되셨다"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말에는 누구나 “아멘”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다”라고 하면 왠지 께름칙하개 여기며,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대로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노예가 어떤 존재인가?
노예는 주인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노예는 오직 주인의 명령에 100% 복종한다. 노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산다.
노예는 이미 신분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노예의 생명은 100% 주인에게 달려 있다.
노예의 운명은 100% 주인에게 달려 있다.
노예는 주인에게 100% 속해 있다.
노예는 100% 주인에게 의존한다.
노예는 주인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노예는 성공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다.
노예는 하루하루 주인에게 충성하며 은혜로 산다.
노예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다.
노예는 100%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한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죽기까지 복종하여야 한다. 노예는 주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섬기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죄의 종노릇 하고, 사탄의 하수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을 구하시기 위해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노예가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 죄를 속하시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죗 값(죄의 삯)을 모두 다 치르셨다((Τετέ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우리를 사탄과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뜻을 '다 이루셨다'.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다시 받으시게 되었다.
이버지의 나라(통치)가 임하개 되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졌다.
영원 전에 작정하셨던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그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왕노릇하던 사탄을 몰아 내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심으로 다 이루신 것이다.
죄에 대해 율법의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다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율법 아래서 죽으신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여호와께 저주를 받았음이라"(신 21:2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요,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 하여서 여호와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는 노예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기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고,
그의 은혜에 매여 스스로 그의 종이 되기를 자원하였고,
우리의 삶이 그의 노예가 되어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살기를 작정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의 노예로 사는 것조차 행복입니다.
그의 종으로 사는 것 조차도 행복입니다.
그의 자녀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탕자였던 아들이 돌아와 "나를 품꾼(종, 노예)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를 영접해 주신 아버지께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