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 신비함
구원은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시고 그로 우리 죄를 대신하게 하사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얻게 된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조석으로 출렁거린다.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찬송을 드리면,
기도하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다가도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영적 침체>가 찾아오면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이나 의심 등이 엄습해 온다.
주변에서 간증하는 것을 보면
왜 나에게는 저런 체험이나 경험, 간증이 없을까? 왠지 열등감에 주눅이 들고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너희가 믿음에 있나?"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주님만 생각하면
당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십니까?

주님만 생각하면 심장이 뛰십니까?

왜 🤔 《회심준비론》이라는 교리가 탄생했을까?
회심준비론은 청교도시대이다.
청교도시대는 신앙이 혼돈했던 때이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s)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개신교도들이다. 이 시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핵심인 교황(중세의 교황제를 그대로), 제도 중심주의로부터 영국 국교회(성공회, 로마카톨릭교황제에서 독립하여 엘리자베드1세 국왕이 수장이 됨)의 순결(purity)과 복음 중심주의를 추구하던 신자들을 일컫는다.
다양한 전통 복음주의자들을 통칭해 일컫는다.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이 제도주의가 남은 불완전한 개혁이었다고 평가하여, 영국 성공회의 정부 중심의 성향과 서방교회의 제도중심주의 잔재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성공회) 영국교회가 핍박을 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의 부흥을 이루었다.
제임스1세(1603-1625)는 "킹 제임스 성경"을 출판하였다. 재임시 도르트 총회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였다.
그는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 국교를 떠난 사람들)를 혐오하였으며, 이를 이유로 청교도들이 영국으로부터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교회(성공회)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이 남아 있었고, 로마카톨릭 교도들은 형식주의 신앙이었다.
이들에게는 회심의 증거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천국(구원)에 대한 열망도 없고, 식어진 형식만 남아 있었다. 이드러한 신앙을 가진 회중에게 무엇으로 영적 각성을 가져오겠는가?
그것은 율법으로 심판, 저주, 그리고 지옥에 대해 외침으로 각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이것(율법)을 전하여 각성시키는 것 = 회심준비론 = 으로 보았다. 미국적 상황에서도 청교도들의 신앙이 흐려지고 둔감해진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들에 조나단에드워드가 율법에 관한 설교로 영적 각성을 일으키게 된다.
영국에서 성공회(영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자들은 저들과 타협할 수 없었다. 그들로부터 《분리주의자》라 불렸고, 또 다른 말로 청교도라 불렀다. 그들이 볼 때 지나치게 극단적인 교리적 완벽함을 추구한다며 비아냥 거리며 불렀던 이름이《청교도》였다. 그들(형식적인 신앙인)이 볼 때 청교도는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onist)이었다.
이러한 신앙(청교도 목회자)의 눈으로 볼 때, 성공회와 로마카톨릭의 형식적 신앙은 진정 회심하였는가? 점검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자칭 청교도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설교와 저서들, 또 그들의 주장은 왜 솔깃하고 감미로울까?
1.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더 강한 맛(MSG)을 내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살짝 신율법주의의 탈을 쓰고 나온 책들이 신선하게 다가오고 더 멋있어 보인다.
신율법주의는 구원에 있어 인간 행위가 반드시 요구된다는 행위 강조를 말하는 신학적 이론. 율법폐기론은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칭의론의 객관적인 면을 강조.
자칫 속기 쉬운 것은 정통신학을 마치 구닥다리라 생각한다.
2. 그리고 새롭게 출간되는 책들(표지 디자인도 산뜻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는 듯한 멘트)에 마치 자기가 현시대의 '청교도 후예'라고 자청하거나 주장하거나, 또 그렇게 믿게 하는 출판사의 홍보 상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청교도 시대의 책들 중에 오늘날 재출간되며, 출판의 힘이라는 새 옷을 입고 입고 등장한다.
그들 중에 위험한 교리가 위험하지 않은 교리처럼 출판사와 추천하는 분들에 의해 조작되어 독자들을 유혹에 빠뜨리고, 비성경적 신학에로 이끌어 가고 있다.
3. 그중에 《회심 준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거스틴, 칼빈, 조나단에드워드, 퍼킨스 등을 언급하며 주장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웨슬리안, 로마 가톨릭, 아르미니안의 교리와 유사하거나 그대로 수용한 위험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회심준비론》은 심판, 지옥, 유기에 대한 인위적인 불안을 조장하거나 내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사람들을 유혹한다.
"내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회개하므로,
구원받기 전에 인간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회심을 준비한다"는 인간적 준비가 필요한 것처럼 조장하고 있다.
4.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회심전 영적 각성으로 사용하시는 한 부분일 수는 있으나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일 수는 없다.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완성했는데도, 율법을 통해 개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구원의 은총을 덧입는다."
이런《청교도 회중파》는 복음이 아닌 율법을 듣고 영적 각성을 한 후 구원을 준비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들의 책들이 무분별하게 출간되어 마치 개혁신학으로 둔갑되어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나 신학은 "회심 전에 인간 편에서 해야 될 율법준수, 인간의 선행, 율법을 통한 영적 각성 등"을 제시한다.
이런 내용을 놓고 볼 때 청교도 회심 준비론은 마치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부족한 것처럼, 회심이전에 그 인간 편에서 무언가를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다(매로논쟁).
그러고 나서야 다음으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복음의 능력을 훼손하며 인본주의적 회개를 촉구하는 비성경적 신학이다.
최근 한국교회에 미국(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회중파들로 형성된 회심준비론이라는 주장이 무분별하게 교회 안에 퍼지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청교도 회심준비론과 청교도 <회중파> 신학은 다르다.
마치 청교도들이 말하던 회심준비론이 우리 시대에 사용하는 회심준비라는 개념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
일부 청교도(알미니안, 웨슬리안 추종자들)의 저서들을 개혁신학인 것처럼 둔갑시켜 출간하면서 문제를 확대시키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인물로 "조나단 에드워즈 회심 준비론"에 대한 오해로 그의 신학을 비판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세미나에서 비판하는 부분은 에드워드나 퍼킨스의 일부분(회심)이며, 전체적인 입장이 아니다.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살펴야 한다.
시대적 상황이나, 전체적인 신학적 맥락이 아닌 책 자체만, 그 일부만 보면 신학적 오해나 왜곡시키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설교나 신학적 가르침은 돌덩이 같이 굳어진 종교인들에게 전한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첫째, 청교도 회중파들은 회심 이전에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한다.
이는 청교도 회중파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원 얻는 회심을 획득하는 길은 당신의 삶을 철저히 계획하고, 율법의 두 돌 판에 나타난 모든 의무를 다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이다.”(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p.259 양낙흥 저)
또한 토마스 셰퍼드가 언급한 “율법과 복음 둘 다를 전하는 것은 좋지만, 복음만 전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율법을 먼저 전해야 한다.”(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p.65 양낙흥 저)
이들의 신학을 이어받은 조엘 비키(시편 23편 설교 출간) 설교와 폴 스몰리에게서도 나타난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회심을 위한 준비가 필요한데, 즉 성령께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기경하여 통회하게 하여 믿음을 일으켜 그리스도를 찾게 만드는 것이다”(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p.15. 마루투스 역) 또 "하나님은 택자들이 복음으로 회심하기 전 율법을 통해 참된 회개를 이루도록 정해 놓으셨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 청교도 준비론이다."(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p.17~18. 마루투스 역)
이러한 주장은 개혁주의 구원론과 다르다. 이들은 회심이전에 율법준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개혁신학에서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율법(십계명)이 무가치하고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덕법 준수는 여전히 삶의 규범으로 유효하나, 율법준수를 우선시하지 아니한다.
둘째, 청교도 회중파들은 회심 이전에 <선행>을 해야 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지 회심을 위한 선행적인 것들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회심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배 출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공의와 자비를 행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의무, 형제와 자매에 대한 의무,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 대한 의무, 이웃에 대한 온유와 공의와 자비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에드워즈의 대표설교선집, p.183. 백금산 역)
에드워즈는 불우이웃 돕기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이 마치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을 얻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확정하는 것은 개혁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우이웃 돕기는 그리스도와 관계를 지속시키며, 더 나은 영적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에드워즈의 대표설교선집. p53. 백금산 역).”
개혁신학에서의 《선행》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성령의 열매일 뿐이다.
셋째, 청교도 회중파들은 회심 이전에 영적각성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월리엄 퍼킨스는 “영적 각성이란 율법을 듣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옥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후대의 청교도들은 그것을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혹은 겸비해짐이라고 부른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소망 없고 속수무책인 것을 깨닫고 구원에 대해 갈망하는 것이다.”(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p.40. 양낙흥 저).
또 토마스 셰퍼드는 “참된 회심, 즉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네 가지의 준비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과 통회,
2) 영원히 멸망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슬픔,
3)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4) 겸비해짐의 단계를 《거쳐야》 믿음을 가질 수 있다”(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p.46, p.89. 양낙흥 저)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단계들을 거쳐야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목회 현장에서 경험들을 가지고 만든 단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예상하는 방식으로, 공식을 따라서 구원하시는가? 예외적으로 이런 것과 상관없이 놀랍게 구원하시는 능력을 행하신다.
이처럼 회중파 청교도들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회심에 대한 신학적 주장들(펠라기우스, 알미니안, 로마가톨릭, 웨슬리안 신학의 일부 교리들을 수용한 것으로 개인적인 체험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은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하지 않음으로 설득력을 잃는다.
이러한 회심준비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에 인간의 책임을 보태어 보려는 시도이다.
인간 편에서 선행적 행동들과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그 결과 비참함을 인식하고 비통함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몰아간다. 스스로 선행들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아야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시고 회심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결론
"청교도"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청교도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청교도는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뱅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이다.
그 안에는 다양한 교파들이 있는데, 장로교 · 감리교 · 성공회 · 침례회 · 회중파> 등이 있다.
또 그 안에 알미니안, 웨슬리안, 자유주의(인본주의)가 섞여 있어 혼란을 야기 시킨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라고 따르지 말고 분별해야 한다. 청교도들(아류들)의 달콤한 말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현대나 청교도시대나 목회자들이 당대에 출판사가 홍보효과로 만들어 낸 베스트셀러에 속기 쉽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혹은 위대한 신학자들의 주장이나 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필터로 재출간한 책들(베스트셀러 작가) 가르침을 맹종하거나 따라가기 쉬운 습성이 있다.
분명히 알 것은 성경은 모든 주장들을 잠재우는 캐논(canon, 잣대)이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후 청교도 시대에도 수많은 저작들 중에 쓰레기들(출판 홍수시대에 출판사가 만들어낸 베스트셀러)도 많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부 《청교도 회중파》에서 강조하는 영적 각성은 비성경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