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부흥을 경험하는 일은 매우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목자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먼저 목자가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평생 부흥을 생각할 뿐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부흥을 가로막는 장본인이 목자가 될 수 있다. 부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자칫 부흥의 징조를 비난하고 판단하려 하는 태도는 《부흥의 불씨》를 스스로 끄게 되어 화석화된 교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부흥의 시기에 일어나는 징조, 현상들, 변화들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서 있다면 축복의 소낙비를 환영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갖게 해주는 이 작은 보고서는 인위적인 부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지우고, 《참되고 성경적인 부흥》을 갈망하게 만들 어 줄 것이다.
부흥의 시기에는 반드시 사단의 방해 역사도 있다.
부흥의 시기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표출되는 시기이다. 또 회심에 대한 몰이해로 불안해하고 두려움 속에 있는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위로와 격려, 그리고 올바른 이해에로 인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루는 《부흥에 관한 이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미흡한 부분도 있다.
모든 것을 글로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충분히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몇몇 작은 부흥의 현장을 직접 목격을 하면서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개인적인 체험과 객관적으로 보게 된 현상들을 바탕으로 기록되었기에 값진 보배가 아닐 수 없다. 다소 신앙감정과 먼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어도 꼼꼼히 읽으며 정리하여 부흥에 대한 관점과 기준을 갖게 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읽고 난 뒤에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간증문으로 기록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비록 부흥이라는 커다란 숲의 한 부분에 불과하더라도)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술한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는 당대에 부흥과 관련하여 신앙체험의 간증이나 목회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생생하게 현장 보고서이다.
국내번역/ 정부흥 역(CLC), 양낙흥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부흥과 개혁사), 백금산역(부흥과 개혁사) 등이 있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간행한 에드워즈 저작전집 7권 부흥론에 실린 양낙흥교수 번역.
들어가는 말 - 본서의 역사적인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매사추세츠주의 산골짜기 마을 노샘프턴에서 1727년 ~ 1750년까지 총 23년간 목회를 하게 된다.
사역 기간하는 동안 그의 교회는 두 번에 걸쳐 "성령의 부어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을 체험한다.
"부흥(revival)"이라는 단어가 그 이전에도 종종 사용되었지만, 에드워즈가 "성령의 부어주심 혹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첫 번째 부흥은 1734년~1735년에 코네티컷 강 계곡을 따라 마을들로 번져 나갔다.
두 번째 부흥은 1740년~ 1742년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1차 대각성운동은 조지 윗필드의 순회 설교가 불쏘시개와 풀무(바람을 일으키는 기구)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의 교회는 영적으로 메마르고,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그 영광스러웠던 청교도적 영성과 도덕성은 느슨해지고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1734년~ 1735년에 노샘프턴 부흥 기간 동안 에드워즈는《반 알미니안주의적인 설교들》을 강하게 설교하였다.
“이신칭의론”(WY19:143-242),
“하나님 나라에로 침노해 들어감”(WY19:302-320),
“룻의 결단”(WY19:336-378),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WY19:339-378),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WY19:563-594)등이 노샘프턴 강단에서 선포된 대표적 대각성 설교이다.
이 때 그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부흥의 증거들을 모아 "성령의 역사 보고서"를 쓰게 된다.
영국의 왓츠 목사와 가이즈 목사가 에즈워드의 글을 런던에서 출판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은 책자는 에드워즈와 같은 해에 출생하여 후일 영국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 목사에게도 영향력을 끼친다.
존 웨슬리는 “나는 옥스퍼드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회심들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서술을 읽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노샘프턴과 그 인근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이었다. 참으로 이는 주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Surely this is the Lord's doing, and it is marvelous in our eyes)". - 1738. 10. 9. 일기-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는 단 몇 개월 사이에 영적 각성이 온 마을에 나타난 과정, 그리고 그 결과 약 300명의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는 은혜 체험의 과정이 매우 구체적이고 기술하고 있다.
에드워즈의 부흥 보고서( C. C. Goen 교수 편집)
I. 새 각성이 시작되다
II. 각성된 자들의 반응
III. 두 특기할 만한 회심자들의 반응
IV. 결론적 고찰
시작하는 글(43-44)
에드워즈는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부흥의 사건을 “경이로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여러 사람들의 요청과 제안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공정하고 신실하게” 부흥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노샘프턴의 최초 목사는 엘르아자르 매더(Eleazar Mather 1661년 ~1669년)인데 그가 요절하자 이어서 2대 목사로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69-1729)가 사역을 했다.
에드워드의 외조부 스토다드는 매더 목사의 미망인 에스더와 결혼, 60여 년 목회하는 동안 다섯 차례나 영혼의 추수기를 경험했다. 에드워즈가 글 쓰는 시점에서 57년 전, 53년 전, 40년 전, 24년 전, 18년 전.
I. 새 각성이 시작되다(45-57)
1. 발단, 갑작스러운 사망 사건
1734년 4월, 그 마을 한 청년이 급성 늑막염으로 죽고, 한 젊은 기혼여성이 죽게 되자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영적인 심각성을 갖게 된다.
1734년 가을, 젊은이들에게 목요강좌가 마친 후에 몇 그룹으로 나누어 모일 것을 권했고, 젊은이들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2. Arminius주의와 이신칭의 설교
그 무렵 그 지역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인하여 잡음이 일어났다. 우려와는 달리 그 문제는 신앙의 증진을 위해 역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즐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한 길'에 관해 문의가 들어왔을 때 에드워즈는 목요강좌 시간에 "이신칭의"를 강론했다. 에드워드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을 더욱 진지하게 찾게 되었다(47).
3. 회심의 시작
1734년 12월 후반, 하나님의 영이 더 비상하게 임하셔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주 갑작스러운 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대여섯 사람이 어느 모로 보나 구원의 학신에 이르는 회심을 얻었다.
그 여성은 매우 사교성이 풍부한 한 젊은이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임하였을 때 그녀는 즉시로 새로운 마음, 참으로 깨어지고 거룩해진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었다.
4. 다른 교인들에 대한 파급
그 소식은 거의 전광석화처럼 온 마을에 걸쳐 젊은이들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퍼져 나갔다. 이내 진지함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사람들을 크게 각성시키는 역사가 일어났다(48).
5. 부흥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마을 전체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종교의 위대한 일들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크고도 엄숙한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주민들은 이웃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종교적인 일 외에는 거의 대화거리를 삼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 일은 아주 사소하게 여기고 의무감에 의해서 했을 뿐, 온통 오직 하늘나라를 얻는 것에 관심이었다.
마치 그들 모두가 천국에로 침노해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자기 《영혼을 위한 기회》를 열심히 포착하려 했다. 신앙적인 목적으로 가정마다 대단히 자주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본래 누구였던가? 가장 허영심이 많고, 영적으로 허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체험적이고 생명력 있는 신앙에 대해 가장 함부로 생각하고 지껄이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같이 주민들 모두가 영원한 세계의 위대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며, 가장 커다란 영적 각성의 세계로 들어왔다.
대다수의 영혼들이 집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몰려왔고 그들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찬양했다(49).
에드워즈의 보고서에 의하면 1735년 봄, 여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온 동네에 가득해 보였다. 마을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그와 같은 고뇌로 가득 찬 적은 없었다. 거의 집집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놀라운 표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족들에게 임한 구원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 시기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주일에 모이기를 힘쓰고, 공중 예배는 아름다웠으며, 회중은 예배드릴 때 생기로 넘쳤다.
성도들은 목사의 전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해서 들었고, 고뇌로 울기도 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울기도 했다.
또한 공중 찬양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전에 없던 넘치는 마음과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찬양은 실로 즐거운 일이 되었다”(50).
평일에도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영적인 일에 대해 대화했다. 심지어 먹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예사였던 결혼식에서 조차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6. 주변 마을들의 반응
1734년 겨울 동안 주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비웃거나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들은 양심에 찔림을 받고 각성되어 상한 심령을 안고 돌아갔다. 방문이나 사업차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분명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이곳에 내려주신 신적 축복의 소나기에 참여했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지역 내의 다른 여러 마을들에도 같은 역사가 뚜렷하게 일어나 가득하게 되었다(51).
7. 군(cointy) 내 다른 마을들로의 파급
에드워즈는 그 지역 여러 마을들이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웃 마을들에도 불을 지핀 것이다. 노샘프턴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일에 쓰임 받는 것을 보고 더욱더 힘을 얻고 열심을 내게 되었다.
8. 코네티컷 주 전체로 파급
이러한 성령 부으심은 에드워즈가 속한 햄프셔 군뿐 아니라 코네티컷 주의 많은 지역에도 일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시무하고 있던 이스트 윈저에도 역사가 일어났다(52-4).
9. 뉴저지의 부흥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는 뉴잉글랜드 지역을 벗어나 남쪽에 있던 뉴저지 지역에도 임하였다. 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넨트가 목회하던 뉴저지 지역에도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10. 어느 모로 보나 비범한 부흥
에드워즈는 앞서 기술한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비범성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였다(54-57).
첫째, 보편성에 있어 비상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전의 부흥들이 주로 젊은이들과 여자들 사이에 국한되었던 반면, 노샘프턴 교회의 부흥에서는 마을의 16세 이상의 젊은이들 절대다수가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중년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변화되었다.
둘째, 회심자들의 수에 있어서 비상했다.
부흥 후 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수는 620명에 달하게 되었다. 600명이라는 수는 노샘프턴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부흥시기에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를 지어 교회에 몰려왔다. 반년 동안에 약 300명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얻었다고 보고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속도에 있어서 비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 안에서 성령은 아주 신속하게 역사하셨다. 성령의 역사가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 이번 부흥에서 사람들은 아주 빨리, 크게 변화되었다.
넷째, 성령의 영향의 (파급) 정도가 비상했다.
즉 각성의 깨달음, 구원의 체험의 정도와 범위가 비상했다는 것이다.
노샘프턴 부흥의 절정은 1735년 봄이다.
“이 마을에서 성령의 역사의 절정은 이른 봄 즉 삼월과 사월이었다. 이 무렵에는 우리 중에서 대개 하루에 네 영혼, 일주일에 거의 삼십 명이 회심하는 일이 대여섯 주간 계속되었다. 하나님이 그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는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축복을 다 사용해서 일 년간 일해야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사역이 단 하루 이틀 만에 완수되었다”(57).
II. 각성된 자들의 반응(58-97)
에드워즈는 두 번째 부분에서 《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해 상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있음과 동시에 많은 점에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이 있음도 인정한다.
1. 회심의 과정에 대한 관찰
회심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각성》이었다.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각성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혼이 멸망할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멸망을 피해 신속히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 현상이다. 각성의 속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갑작스럽게, 어떤 이들은 서서히 각성되었다. 양심에 갑작스러운 찔림을 얻은 자들은 마치 심장을 화살이 꿰뚫은 것처럼 되었다. 점진적인 각성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먼저 이전보다 신중해지고 그 후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 후 각성이 심화되면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각성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즉각 죄악과 방종을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툼, 중상,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일을 즉시 중지했다.
술집은 텅 비고 대신 목사관이 붐비게 되었다.
또 다른 결과는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경 읽기, 기도, 묵상, 예배 참석, 소그룹 모임에 큰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처음 구원을 찾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 대해 아주 무지했다. 그들은 자기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는지, 죄악 중에 얼마나 죽어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영혼과 영적인 것에 무지, 눈멈, 어두움)
2. 준비 과정의 (매우 폭넓은) 다양성
각성 상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괴로움의 정도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진행했고, 어떤 이들은 저주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그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점점 더 증가되었다. 에드워즈는 각성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회심과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아주 신속히 회심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회심의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함에 있어 그는 그 전의 청교도들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매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 보였다. 심지어 청교도들에 의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거의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라 여겨졌던 죄에 대한 깨달음조차도 에드워즈는 그것이 회심 전에 그리 깊지 않다 하더라도 회심 후에 훨씬 더 깊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들이 체험하는 구원의 은혜의 크기가 그들이 회심 전에 경험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꼭 비례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지적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그리 분명치 않았던 어떤 사람들이 후에 누구 못지않게 분명한 은혜를 체험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죄에 대한 율법적 깨달음 아래 있는 동안 가장 큰 두려움을 가졌던 자들이 항상 가장 큰 빛과 위로를 얻는 것도 아니었다.
또 그런 사람들이 항상 갑작스러운 빛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회심의 때에 관한 한은 그러한 자들이 대개 가장 잘 인지하고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사람들이 고통 아래 있는 시간, 즉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는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불과 며칠이 소요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렸으며 심지어 수십 년이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철저히 각성되지는 못했지만 자기 영혼의 상태가 양호한 것이라는 아무런 위안되는 증거를 얻지 못해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구원에 대해 염려하면서 그것을 위해 상당한 수고를 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정당한 이유를 가진 두려움들 외에 때로는 불필요한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것은 사탄이 그들을 혼란시킨 결과였다. 때로는 병적인 우울증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그것만큼 사탄이 즐겨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고 에드워즈는 탄식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비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부흥들에 비하면 1735년의 부흥 시에는 사탄의 역사가 훨씬 적었다고 에드워즈는 평가하고 있다. (부흥과 사탄의 방해하는 역사들)
실제로는 크게 각성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각성되지 않은 강퍅한 심령이라고 자책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오해). 그것은 그들의 각성이 깊어질수록 더했다. 때로 위험한 절망의 언저리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다(지나침).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하에서 죄책감으로 울부짖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에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로 전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좀 극단에 속한 경우들이었고 보편적으로는 공포가 그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3.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각성된 죄인들은 점차 자신의 죄를 확실히 그리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의 사악함과 죄악 됨, 그들의 불충분한 의와 오염,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게 해 주셨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죄악들에 집중되었지만, 그 후에는 <내적 죄, 즉 마음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더 강해졌다.
그들의 부패한 본성, 교만, 불신등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오염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깨끗게 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즉 옛날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흔히 자기 힘으로 의를 세우려는 율법적 노력에 호소했다. 엄격한 생활, 죄의 자백, 종교적 의무 이행등으로 하나님을 달래고 자기 죄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패가 거듭되는 만큼 실망도 거듭된다. 때로 그들은 그러한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위로가 주어지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반감 때문이었다.(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각성이 동일할 수 없다. 그 은혜는 고저장단좌우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임함)는 것을 그러는 중에도 죄에 대한 깨달음의 상태는 계속되었다. 때로, 그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여 절망 중에 자포자기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때에 도움이 된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해 과거에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복음적 내용이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메시지도 처음부터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만일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낳기 위해 처음에는 복음의 선포를 미루고 단지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메시지만을 전한다면, 절망에 빠질 죄인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성아래 놓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완전 충족하신 자비에 관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주 격려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었다.
결국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는 율법의 말씀과 은혜의 말씀이 골고루 섞인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각성과 격려, 두려움과 소망이 적절히 혼합되어야 해이와 태만, 그리고 결국에는 무관심을 낳는 두 극단인 자만심(자기 스스로 확신)과 낙심(자기 스스로 절망) 사이에 중요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균형과 조화가 필요함).
그러나 죄를 깨닫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단계에 있는 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사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들을 용납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신들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보려는 《율법적 시도》를 거듭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당신은 자기 힘과 의를 너무 의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포장만 바꾼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자기 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무 긍정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한밤중처럼 캄캄해 보인다.
마침내, 그들은 힘이 진하고 상한 마음이 되며 율법적 겸비함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전적 무능과 불충분성을 확실히 깨우쳐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참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는 노력을 쏟는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에드워즈는 주목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구원의 서정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반복되는 무익한 시도들의 끝에 자신들의 율법적 노력의 무가치함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 후에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 없이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허망한 자기 신뢰를 극복하고 진토에까지 낮아져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강조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길이라는 말이다.
4. 겸비해짐
각성이 구원의 체험으로 연결되는 경우 율법적 고통 후에 죄인들이 깨닫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청교도적 용어로 소위 겸비해짐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눈물이 그들의 가장 작은 죄조차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마음과 생활이 너무나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을 본다고 말했다. 그들은 설령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이며, 그의 정의로우심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저주받고자 하는 마음(a willingness to be damned)이라고 불렀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대개 값있고 충족한 은혜를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님의 정당성을 발견하기 직전까지 대개 아주 초조해하던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에 고요와 평안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은혜를 받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하나님의 발아래 누워 그의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청교도들의 용어로 소위 준비된 마음(prepared heart)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고요함이 얼마간 계속되다가 드디어 어떤 특별하고 즐거운 현현이 그들의 영혼에 이루어진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하고 있다.
아주 종종 자비하신 하나님, 충족하신 구속자, 혹은 복음의 이 위대하고 즐거운 일들에 대한 어떤 위로를 주는 달콤한 전망이 즉각, 혹은 금방 뒤따랐다.
5. 드디어 은혜를 체험함
율법적으로 겸비해진 사람들에게 은혜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은 아주 다양했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자기 앞 시대의 청교도들과 견해가 달랐다. 앞 시대의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어떤 특정한 단계나 방법들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의 규범(일반화된 틀)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무한한 다양성 중 일부를 소개한다.
1) 어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 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러한 갈망은 신적인 것들의 최고의 탁월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만 생길 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그것을 자신의 최고의 행복과 최선의 분깃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선한 것을 영원히 추구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러한 체험이 시작될 때는 대개 다른 경험들과 발견들이 즉시 뒤따라왔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한다. 그것은 아주 다양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공통점)은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 그리스도가 마음에 부각되는 것이었다.
2)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그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을 줄 곧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충족성을 보았다.
3) 어떤 이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진실하심과 신실성을 보았다.
4) 어떤 이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은 복음이 전체적으로 진리이며 확실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약속의 진실성이 그것이었다.
5)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진실한 초청이 그들 마음에 나타나는 체험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특별한 성구가 마음에 머무르면서 그들을 위로했고 때로는 은혜로운 초청과 약속에 관한 여러 성구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씩 떠올라 영혼에 점점 더 큰 만족을 주었다. 그러한 성구들은 그들의 처지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위로는 어떤 때는 성경을 읽고 있는 중에,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일반 서적을 읽고 있는 중이나 묵상 중에 주어졌다.
6) 어떤 이들에게는 목숨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사랑 혹은 속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보혈의 충족성과 귀중함이 부딪혀왔다.
7)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우심의 가치와 영광을 보았다.
8) 어떤 이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에 사로잡혔다. 혹자는 그리스도가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방법이 탁월하다는 것과 그것의 적합성에 대한 생각이 다가왔다. 그러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항상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6. 은혜받은 자들의 반응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을 보였다.
☆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다.
☆ 어떤 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다.
☆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큰 감사를 표현했다. 이들은 가지들이 누리게 된 영혼의 그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의 탁월성에 경탄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상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잡되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기쁨으로 충만한 동안 그들은 식사도 잊어버렸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고 달콤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탁월성에 대해 가장 주의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황홀한 감각이 거기에 동반되었다.
이러한 은혜 체험을 묘사하는 단어들도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보았다(sight)고 했고, 어떤 이들은 발견했다(discovery)고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실감케 하는 확실한 깨달음(realizing conviction) 혹은 마음의 생생한 혹은 느껴지는 감각(lively or feeling sense of heart)이라고 묘사했다.
7. 회심되고서도 그것을 정작 모르고 있는 자들
1)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의 거룩한 평정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아직 회심되었다고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회심에 대한 몰이해). 그것은 영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영접임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한 구원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달콤한 만족이야말로 그 자비를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비를 추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 발아래서 그의 자비를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겨울나무 혹은 딱딱한 흙 밑에 눌려있는 봄의 씨앗이라고 비유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애처롭게도 자신들의 마음에 생겨난 위로와 은혜로운 감정들을 억누르고 제거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생겨난 그러한 감정들이 보편적 조명이나 순간적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그들은 자기들이 혹 그릇된 소망을 품고 있다가 영원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바른 지도를 받아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은혜로운 성향이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띠었다. 마치 따뜻한 봄볕이 씨앗을 움틔우는 것처럼 이제 자유롭게 된 은혜가 넘쳐 흘러나와 그들에게 풍성한 만족의 원천으로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2) 회심체험에 관련된 다양성은 회심의 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났다.
은혜의 최초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정확한 시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각을 쉽게 식별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 정확한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회심 날짜를 잘못 알고 있다.
그 이유는 회심의 체험의 양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최초로 체험할 때 그것은 자주 빛의 비췸으로 나타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어떤 사람을 회심시키는 빛은 그의 주위를 온통 갑자기 비추는 영광스러운 광채와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침이 밝아오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약간의 빛만 나타나지만 점점 더 그 빛이 증가한다. 이따금 어두움이 드리우지만 결국은 구름을 뚫고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으로 체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에 대한 에드워즈의 묘사는 문자 그대로 극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주목하게 한다.
죄의 인식과 변화들
1) “죄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한 극단적 공포 후에 죄인들이 감지하는 최초의 변화는 종종 《고요함》이었다.
2) 그런 다음에 빛이 서서히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두움 후에 처음에는 가물거리는 빛이, 그리고 한두 마디의 위로의 말씀이 부드럽게 그들에게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달콤함과 구주의 사랑에 대한 약간의 지각을 가지게 된다.
그때 공포와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무가치함에 대한 겸손하고 온유한 감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어떤 성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3) 잠시 후에는 빛이 더욱 강력하고 분명하게 들어온다”(81).
청교도 목회하에서 회심의 은혜 체험은 대개 복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확신을 가져왔다고 에드워즈는 기억한다.
기독교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 사람들 앞에 제시되는 순간 그들은 그것에 대한 (영적) 시각과 미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때의 그들은 복음의 교리들의 진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마치 그들이 환한 대낮에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볼 때 그 강한 햇살로 인해 태양의 존재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아주 분명한 성령의 역사들과 신성의 강력한 증거들을 직관적으로 보고 직접적으로 느꼈다.
이 직관적 시각과 감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체험의 핵심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머리 지식 혹은 관념적 사변적 지식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이제 복음의 진실성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남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서 그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아해했다.
8. 은혜 체험 후의 변화된 모습들
《회심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이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설교가 새롭게 들린다. 성경이 새로운 책인 것 같다. 거기서 새로운 빛을 보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읽을 때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실재적인 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느라고 몰두한다.
어떤 이들은 부모와 세상 전부를 떠나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가련하고 비참하며 무가치한 존재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식에 압도당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과거에는 모두 너무나 냉정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충만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겼다. 그들은 대개 하나님 앞에 낮게 엎드려 재 속에 처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표현했다. 그들이 진토 속에서 낮아져 자신을 비웠을 때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을 그들은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켰을 때 그들은 만족스러운 안식을 가장 많이 즐겼다.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이 성경만큼 즐거워한 책은 없었다.
그리고 주일만큼 귀히 여김을 받는 시간도 없었다. 예배당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곳도 없었다. 회심자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놀라운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그들에게 가장 불친절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러했다. 사람들은 남에게 끼친 해악을 고백하고 보상하는 데 열심이었다. 회심자들은 다른 영혼들의 회심에 대해 지극한 소원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가장 미미한 동료 인간이나 가장 악한 원수들의 회심을 위해 자기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9. 회심된 자들에게 남아있는 부패
이처럼 놀라운 영적 변화와 감격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심된 자들 중에 구원의 확신이 너무 강해서 자기 점검이 불필요할 정도였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에드워즈는 기록한다.
회심된 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진 가장 큰 원인>은 그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너무나 많은 《부패》 때문이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할 때 온통 생기로 가득했던 영혼이 차츰 둔감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교만, 시기, 원한, 복수심 등 아직 자신들 속에 남아있는 세상적 성향을 발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출렁이며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모두 헛것이며 자기들은 위선자일 뿐이라고 (자기) 결론짓게 한다. 그들은 자기의 강퍅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성령의 영향이 회복되어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이 되살아나면 의심과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은혜살림).
사람들이 영적 무기력과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종종 《종교적 대화》였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신앙적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영혼이 넘치는 기쁨으로 거룩한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다.
10. 에드워즈 교회의 부흥에 대한 주변의 반응
이러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노샘프턴 교회 신자들과 에드워즈는
1) 외부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는 뉴잉글랜드 대부분 지역들이 노샘프턴을 비롯한 코네테컷 골짜기 부흥에 대해 비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 부흥에 대해 시기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불평한다.
2)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퀘이커 교도들과 유사하다고 비난했고,
3) 어떤 경우에는 종말론과 관련해 오해하기도 했다.
4) 어떤 사람들은 노샘프턴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영적 체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것은 에드워즈의 변명에 의하면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의 결과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일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그 문제를 대화의 소재로 삼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진술하는 이 역사가 과거의 부흥들의 연장 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부흥은 자신의 전임자인 스토다드의 목회아래서도 몇 번 일어났다. 그때 역사했던 것과 동일한 영이 이번에도 역사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의 비범성뿐이라는 것이었다.
“전에 회심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축복의 소나기에 같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의 갱신시키고 강화하고 세워주시는 영향을 받았다(And God's people that were formerly converted, have now partook of the same shower of divine blessing in the renewing, strengthening, edifying influences of the Spirit of God)”(96).
III. 두 특기할만한 회심자들의 예(98-115)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부흥 가운데 성령의 역사의 성격과 방법을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두 특별한 예를 상술한다.
성인으로 아비가일 허친슨(Abigail Hutchinson)과 겨우 네 살이 된 소녀 피비 바틀릿(Phebe Bartlet)의 경우이다.
1. 아비가일 허친슨(Abigail Hutchinson)[98-107]
아비가일은 노샘프턴 부흥 기간 중에 영적으로 각성하고 요절한 성도이다. 그녀는 지적인 집안에서 출생하고 교육받았기에 열광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주 차분하고 얌전하며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우울증 증세를 보인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1734년 겨울 중생의 은혜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오빠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어떤 젊은 여인의 회심이야기는 아비가일의 (영적) 시기심을 발동시켰다. 그녀는 성경을 철저히 읽기 위해 매달렸다.
1) 처음에는 공포의 체험이 왔다.
원죄, 하나님을 불평한 죄, 그리고 효도를 다 못한 죄가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죄성에 대한 감각은 며칠 간 계속 증가되었다.
2) 그러다가 어느 월요일 아침 자기 마음속에 느껴지는 평안함과 고요함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한 생생한 감각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그가 충분한 속죄물이 된다는 인식을 동반했다. 그리스를 묵상하고 조망하면서 커다란 기쁨과 감미로움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수요일 아침 그녀의 영혼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찼다. 그녀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증거하고 싶었으나 건강상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달콤한 감각을 느꼈다. 신적 속성들 각각의 영광에 대한 감각으로 충만해지기도 했다. 그녀는 종종 나무들, 들판의 변화 및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사역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표현했다. 그녀는 성경을 읽고 있는 중 자기 영혼 위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한 숨결을 느끼고 성경이 어떤 진리와 신성에 대한 느낀 소감(sense)을 표현하곤 했다. 그녀는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소망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가운데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상에서 천국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건강은 목구멍의 문제(질병)로 고통을 당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파리하게 말라갔다. 그러다가 1735년 6월 27일 금요일 정오 마치 잠드는 사람처럼 어떤 몸부림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에드워즈는 아비가일이 자주 자지러지고 은혜스러운 감정에 압도당했던 이유의 일부는 몸이 약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를 체험했던 것이다.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약한 몸 때문에 방해받는 일없이 강한 은혜가 더 자유로이 역사할 수 있는 곳에 그녀는 있고 싶었고, 그녀의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에드워즈는 아비가일 허친슨의 예를 참으로 두드러진 기독교적 체험의 한 사례(a very eminent instance of Christian experience)라고 말한다.
2. 피비 바틀릿(Phebe Bartlet)[108-115]
피비 바틀릿은 1731년 3월에 태어나서, 1735년 4월 - 5월 사이에 11세이던 오빠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신앙의 감화를 받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위대한 일들에 대해서 지각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벽장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모습이 마침내 엄마의 눈에 발견되기에 이른다.
6월의 마지막 날 목요일 피비의 엄마는 벽장 소에서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된다 :
"찬양을 받으실 주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게도 구원을 주세요!
제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
영혼을 쥐어짜는 기도를 마치고 나온 피비는 엄마 곁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지 않을까 봐서, 그리고 지옥에 갈까 봐 무서워서 그렇게 울었다.
엄마는 아무리 딸애를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더욱 간절히 울부짖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피비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미소 띤 얼굴로 "엄마, 천국이 내게 왔어요"라고 말했다. 피비는 이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엄마, 아빠보다 더 사랑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에, 어느 누구보다도요"라고 대답했다.
천국을 발견한 피비는 사촌 동생이라든지 언니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곳에 가려면 자신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였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야",
"하나님 네비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유니스 언니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피비는 또한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조바심 내는 피비를 보고 왜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 묻는 사람에게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요"라고 피비는 대답했다.
자기 집에 방문해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저분들께서 또 오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비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아주 커 보이고 그분에 대해 범죄하는 것에 대해 비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자두 서리 사건-p.112).
피비는 때로 자기 마음에 떠오른 성경 구절들에 의해 크게 감동을 받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1735년 11월 초순 피비는 계 3장 20절 말씀으로 인하여 큰 기쁨을 경험하하게 된다.
그 해 겨울 아이의 엄마는 어린 딸이 한밤중에 깨어 흐느끼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딸아이는 영적인 열정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상태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간밤의 일에 대해서 묻자,
피비는 "예, 조금 울었어요. 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분들은 저를 사랑하셔요"라고 대답했다.
피비는 신앙적 각성이 없는 언니 네이비와 유니스에 대해서 계속 영적 관심을 나타냈다. "언니들이 기도해야 하고, 죽을 준비를 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얼마 밖에 살지 못했지만 준비는 항상 해야 한다고 했어요".
또한 피비는 불쌍한 이웃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도 나타냈다. 피비는 흔치 않은 정도의 사랑의 영을 드러냈다(114). 피비는 자신의 목사에 대해서도 커다란 사랑을 나타냈다.
피비는 은밀한 기도 생활을 계속했고, 피비는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요리 문답서를 읽고 자는 것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가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듯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음에 약간 의심스러운 말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의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IV. 결론적 고찰(116-121)
1. 대각성의 퇴조
1734년-1735년에 걸쳐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 성도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그 시기는 가장 건강한 시기였다.
하지만 특별한 부흥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커다란 영적 고통 속에서 자기 목을 따려는 격렬한 충동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거치는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1735년 5월 하순경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서 물러가시고 계시다(이가봇)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탄이 더 자유로이 역사하고 있으며 무섭게 날 ㅣ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조짐의 첫 사례는 다름 아닌 에드워즈의 이모부인 조셉 홀리의 자살이다. 홀리의 집안은 우울증을 병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고민으로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고 밤중에도 지옥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의 목을 찌름으로써 생을 종결하였다.
후일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해임당할 때 반대편 선두에 섰던 사람이 바로 이 홀리의 아들이다. 그도 후일에 에드워즈에 대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자살하고 만다.
아무튼 조셉 홀리의 자살 소식은 사람들의 마음에 비상한 영향을 미쳤다. 여러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상한 광신적 망상에 빠져 들어간 두 사람의 사례가 발생했다 (서필드와 사우스 해들리 사람).
한 사람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이 비상한 역사가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그 영광스러운 시기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117-8).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노샘프턴 지역에서는 회심이 드물게 일어났다(피비 바틀릿의 경우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리고 얼마 안 되어 하나님의 영은 이 군에서 아주 현저히 떠나시는 것 같았다.
노샘프턴과 주변 지역 사람들은 여러 달 동안 하나님의 일이 다시 소생될 것처럼 소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세는 그 일반적이고 집중적이며 생기 있는 신앙적 혼이 서서히 시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마는 일들이 발생했다.
사람들의 대화 소재는 "(정치적 이야기) 총독의 방문, 인디언들과의 조약에 관한 의회의 위원회, 스코필드 논쟁"등으로 쏠렸고, 곧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meeting house를 짓는 일에 몰두하고 말게 된다(119).
2. 대각성의 결과들
그러나 에드워즈의 관찰에 의하면 대각성 기간 동안 회심되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그 후에도 《지속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 하나님과 신적 속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및 복음의 위대한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 주제들의 《진리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기질과 태도>가 과거에 아주 거칠었던 어떤 이들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졌다. 어떤 이들의 영혼은 빛, 사랑, 그리고 위로로 충만했다.
보고서를 쓰던 시점(1736년 11월)의 노샘프턴 사람들은 여전히 종교적인 주제로 대화를 즐겨했다. 젊은이들 중에는 과거의 해이하고 방종한 생활로 돌아간 사람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변화된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셨다"(120).
“하나님은 여러모로 이 일의 방식을 주관하셔서 그것이 그분 자신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일임을 분명하고도 경이롭게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그 영광을 전적으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에 돌리셨다.
그 부수적 상황과 수단이 어떠했건 간에, 그리고 비록 우리는 아주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들이다! 여기 세계의 이 구석에 하나님이 거하시면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121).
정리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라
자칫 성령의 역사를 왜곡, 편파적인 해석으로 신학적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혹은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스펄전, 이안머레이의 부흥과 관련된 책들도 함께 읽기 바란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분별
피니의 책들도 함께 읽으며 부흥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의 신학을 다 수용할 수 없으나 부분적으로 유익한 부분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에드워드가 말한 부흥 현상에 대한 보고서 내용들이 찰스피니의 부흥에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후 부흥들에서도 어느 정도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