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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오늘은 기독교신앙의 핵심논쟁이 되는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알아 보려합니다.

본문: 로마서 7장 14- 25절

칼빈의 기독교강요[제2권 : 그리스도의 구원]

4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어떻게 역사 하는가?
5장 《자유의지》를 변호할 때 흔히 제기되는 반론들을 반박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행위, 자유의지) 은 오래된 신학적 논쟁 중 하나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하다.
그러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필요할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건강하다면 하나님의 주권도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도 저도 아니면 구원은 하나님 50%, 인간 50% 협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 100%라고 하는데, 인간의 의지는 0%인가? 아니면 인간의 노력(행위)도 포함되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죄는 누구의 책임인가

인간은 원죄로 타락한 이후로 본성상 부패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원죄는 인간을 지배한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인가? 아니면 《원죄》인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 났는데, 왜 인간의 책임일까?
내가 자유의지로 죄를 지어야 내 책임이라 할 수 있는데, 내 안에 있는 원죄가 나의 의지를 지배하여 죄를 짓게 하였다면 나의 의지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인가? vs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는가?

1.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의지는 구분되는가?
2.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말미암는 구원 이후에 정상으로 작동하는가?

3. 인간의 자유의지와 의지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구원은?

삽화: 구본철 화백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책임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는가?
우리에게 다소 찜찜한(?) 결론을 내린다.
인간이 죄를 짓는 원인은 무엇인가?
죄를 짓는 것은 원죄 탓인가? 내 탓인가?
성경은 죄는 유혹을 할 뿐 강제적으로 죄를 짓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죄의 유혹(속임)에 이끌려 죄를 지은 것은 인간 탓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한다.

이를 동의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러한 정통교리는 자유의지론자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펠라기우스와 같은 신학자는 결국 모든 것이 다 인간 중심적으로 "죄도 인간이 지은 것이고, 구원도 인간 하기 나름(노력)"이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의 논리는 계몽주의자들의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와 펠라기우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주장,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하며 로마 제국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조시모 교황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다. 다시 정죄되었고,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다시 한번 정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만이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로 죄에 오염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그 후손이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인 질병과 같았다. 또한 인간은 손상된 상태에서 스스로 그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존재였다.
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아담의 죄는 그 자신의 죄였을 뿐, 그의 후손들은 죄의 본성을 물려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각 인간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시므로, 모든 인간의 영혼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함에서 시작된다(자유의지)고 말한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2절)
•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15절)
•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 (16절)
•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17절)
•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18절)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19절)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루터와 에라스무스, 칼빈과 피기우스(S. W. Pighius, 1520-1604)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다. 성경은 구원이 인간의 믿음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단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인본주의 신학들

펠라기우스와 계몽주의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정통신학은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스콜라철학이 그들의 사상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소위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 혹은 개신교정통주의 시대 때 시작하였다.
1560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한 아르미니우스 (J. Arminius, 1559-1609)에 의해 시작된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능력을 구원에서 인정한다.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에서 있어서 합리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의지적 결정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교리적으로 감리교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정한 웨슬리주의를 구원론으로 채택한다.


인본주의 사상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로 유럽은 격동기처럼 흘러가며 많은 사상들이 등장하였는데, 중세시대의 농노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봇물터지듯 주어진 새로운 사상을 따라 혁명으로 자유를 얻게 된다. 중세라고 하는 종교적 노예시대에서 벗어 나면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수많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상들이 등장한다.
계몽주의(18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발전- 불가지론 입장/계몽사상 시대를 라이프니츠(1646-1716)와 칸트(1724-1804)의 경계로부터 17세기말에서 18세기 전체에 이르는 시기)와 산업혁명(영국에서 시작, 1760년~ 1820년과 1840년)과 시민 혁명인 프랑스대혁명(1789),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공산당 출현( 공산당선언 1848년 2월 21일 출간)과 실존주의철학 또한 철저한 계몽주의, 인본주의가 등장하며 종교개혁으로 참된 신앙으로 되돌아 가는 상황 속에 기독교는 그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었다.
니체(1844년 ~1900년)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은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가르치며 신은 죽었다는 말로 기독교를 배격하려 하였다.
내부에서는 펠라기우스의 제자들 중에서 다소 중도적인 입장을 반(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50: 50로 서로 협력한다(신인협력설)을 주장했다.

자유의지, 자유

의지의 지유,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이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을 말할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를 짓지 않을 자유, 그리하여 구원에 이를 만한 선을 행할 자유가 없다"는 뜻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죄가 왕노릇)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할 수 있다.
히틀러가 행한 끔찍한 만행과 학살은 바로 히틀러 그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다.
우리들 역시 선택과 행함의 의지가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이는 죄가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측은지심으로 선행을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예배드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예배하는 것은 행위일 뿐,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온전히 경배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이처럼 인간이 자유의지로 도덕적 선행을 행할 수 있으나 그 선행의 기준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는 선행은 아니다.
살인자가 선행을 하면 그 선행이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그가 자유의지가 선하게 작동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4)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온전히 얻을 수 있다.
타락한 인간에게도 인간 안에 남겨두신 양심으로 일부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능은 남아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중심의 부패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부패성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제어되고, 사회적 규범이나 법적 처벌 등에 대한 것을 앎으로 마음의 악이 어느 정도 절제되고 있다.
이 부패성은 범죄 할 조건이 주어지면 발동한다.  
왜 그럴까?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나 도덕적 선행 수준의 의지만 있을 뿐이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있지만 그 자유의지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양심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일정한 수준으로 제어할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
그런데 죄가 죄를 짓게 유혹(속임)하면, 인간의 의지가 꾐에 넘어가고 만다.
그 유혹이 너무나 강력하고 왕노릇하므로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야 만다.
이러한 죄의 지배는 부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길 은혜의 지배 아래 살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우리 스스로의 힘이나 자유의지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를 주장할 때이다.
롬 7: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지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처럼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보자.
모래 늪에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그의 처지를 보고 달려와 그를 불쌍히 여겨 밧줄을 던져 주었다. 그는 천만다행으로 밧줄을 잡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빠져나왔다.
그러면 그는 내가 빠져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다행히 밧줄을 잡아서 빠져나온 것인가.
밧줄을 주신 분 곧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50:50으로 협동하여 구원을 얻은 것인가?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100%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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