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로우 지지자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복음》은 바로 "그분의 복음을 입은" 그리스도시다.
어거스틴의 이렇게 표현했다.
"복음"은 '성육신을 완성하고 속죄와 부활, 승천, 하늘 통치를 이루신 온전한 그리스도'(totus Christus)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구분할 수 있지만,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분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은 없지 않는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눌 수 없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하신 일,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로 묶으신 것을 우리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순종으로 이루신 십자가의 사건이 복음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이고, 그가 말씀하시고, 또 이루신 일이 복음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믿는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과정에서 믿음과 회개가 능동적(인간의 적극적인 행위로 얻는 구원)인가?
수동적(은혜를 수납하는 믿음의 순종을 얻게 되는 것)인가?
간단하게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
《정수 : 복음의 핵심》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약속으로서 주어졌으며, 신자의 구원의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신자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열매로 일어난다.
또한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었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정수를 반대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는 것이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를 거부하고, 보편속죄론(universalism)을 지지한다고 이해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 오해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신율법주의 신학에 따라)는 복음은 오직 《준비된 죄인들》에게만 제공되어지며,
구원의 확신은 신자의 선행에 있고,
순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두려움 가운데 임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생긴 《정수논쟁》은 속죄교리,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제공되어지는지(gospel offer)에 대한 논의였다.
물론 이는 필연적으로 복음과 율법, 그리고 신자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신율법주의(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인간의 행위를 강조)를 따른 것은 이미 아르미니안주의¹ 신학적 요소가 많이 혼합되어 있다.
짧게 요약하자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신율법주의는 알미니안주의와 로마가톨릭의 교리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용하면서 발생했다.
신율법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복음의 정수를 올바르게 제공한 토마스 보스턴과 정수 지지자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의해 율법 폐기론자라는 정죄를 받았다. 정수와 그 지지자들이 올바른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복음을 바르게 증거하였음에도 말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해서, 한국교회가 "행함 있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보며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부분은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반대하던 신학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값진 구원을 거저 준다.
그 구원은 우리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감사함으로 선행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
즉,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어 있지만 결단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칭의는 언제나 성화에 선행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간다.
전도자 이기 때문에 전도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구분된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에 무언가를 더하는 일도, 또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값싸게 만드는 일도 우리는 피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 전진하는 길을 우리는 배워가야만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례자의 길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또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을 주신 분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가실 줄 우리는 확신하기에 이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다.
https://lewisnoh.tistory.com/m/entry/%EC%A0%95%EC%88%98-%EB%85%BC%EC%9F%81%EA%B3%BC-%EC%8B%A0%EC%9C%A8%EC%A3%BC%EC%9D%98
참고.
1. 아르미니우스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는 1) 예지(豫知)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 2) 무제한적 속죄, 3) 부분적 타락,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5)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했다.
2.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노력을 통하여 성취된다.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을 예비(豫備)하셨지만 하나님의 예비(豫備)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협동할 것을 택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해서만 효과가 있다.
인간의 의지(意志)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누가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인가를 결정한다.
2. 웨슬레안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과 인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복음적 신인(神人) 협동이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선재적(先在的) 은총이 주도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들을 웨슬레안 알미니안주의자라 한다.
https://m.cafe.daum.net/wesleystudy/82dS/36?listURI=%2Fwesleystudy%2F82dS
카테고리 없음
복음의 핵심(정수)(2)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