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온전한 그리스도(싱클레어 퍼거슨)

 8~10장 요약   

8장 원인과 치료제

 

율법폐기주의는 십계명의 의무적인(양심을 자극하는) 특징을 거부하는 것이다. 18세기의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율법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성경적 관점이 아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서로 반대어가 아니다. 또 율법폐기주의나 율법주의가 서로의 해독제가 아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페기주의의 반대어는 은혜”(해독제)이다.

율법폐기주의자들은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 그들도 역시 율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의 속박을 모두 깨뜨릴 유일한 치료제다. 가장 심한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믿음으로 완벽히 의로워진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선행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 부패한 본성 속에 율법주의 깊이 박혀 있다)는 뿌리가 같다.

 

율법과 은혜

율법주의자와 율법폐기주의자들은 둘 다 율법(律法)’을 문제로 보지만, 실제로는 ()’. 율법은 오히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한 것이다. 우리의 진짜 적()은 우리 안에 거하는 (). 죄에 대한 해결책(치료제)은 율법도, 율법폐지도 아니다. 치료제는 은혜(5:12~24).

, 그리스도와 연합(6:1~14) 곧 결혼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7:1~6). 신자는 율법에 대해 죽었지만, 율법은 죽지 않는다. 율법은 신자에 대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은혜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랠프 어스킨) 율법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복음은 그렇게 할 힘을 준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이루신 것을 보고, 그의 용서하시는 음성을 들으면, 노예가 자녀로 변하고 의무가 선택으로 변하네.”

율법주의나 율법폐기주의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시각만이 아니다. 율법폐기주의는 궁극적으로 율법과 복음 모두에서 나타나는 은혜에 대한 잘못된 시각 그리고 은혜 이면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다. 바울은 율법주의, 율법주의자, 율법적인, 율법폐기주의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해 폄하하는 것 같은 표현들은 율법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7장 전체가 율법의 본질과 역할을 설명하는데, ()는 율법으로 드러난다(7절중).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을 품고 있다. 율법은 생명을 약속(이것을 하면 살리라)했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율법(律法)이 아니라 죄(). 죄가 율법을 죽음의 도구로 바꾸었다(10)

 

율법을 주신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

율법은 본래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한 것이다. 성령과 조화를 이룬다. , 성령 안에서 우리는 속사람으로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사랑하고 이루셨다(율법을 지키셨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시고, 율법을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랑은 율법(계명 곧 십계명)의 완성이다(13:10).

계명이라는 철로 위에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기관차가 달린다. 사랑이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고, 율법은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둘은 상호의존적이며 별개로 작용할 수 없다.

 

구속역사라는 배경 속의 율법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종교법 혹은 의식법), 그리고 백성간의 관계(시민법)를 이끌 율법을 주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받는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통제할 계명들(십계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힘과 동기를 주신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는 서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의 법에서 임시적이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廢止)되었다. 시내산 언약이 교회에 대한 구속력을 잃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 요구하는 의식법을 완성(2:15~16), 시민법(이웃을 사랑하라)의 종말을 고했다(2:14~17). ,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시민법은 완성되었다. 또한 도덕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8:3~4). , 이 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우리 안에서 계속 완성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율법의 마침 목적(텔로스)’을 본다.

그리스도는 율법(律法)을 폐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롬13:8~10, 6:1 등에서 율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어겼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의식(제사)을 마련해 주시고 계명들을 통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방향을 알려 주셨다. 그들에게 율법은 삶의 규칙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속박된 삶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적용하려 할 때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모두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로 여기지 않으셨다. 우리들도 그렇다.

 

두 형제 이야기

율법폐기주의자인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서 율법주의의 유혹을 받았다. 아버지의 집에 가서 종이 되어야겠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용서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고, 순종적인 아들로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

율법주의자인 형은 아버지의 은혜를 맛본 적이 없다. 율법주의에 물든 탓에 그는 아들로서의 특권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는 은혜를 제시했다. 형이 아버지의 은혜를 받아들였더라면 매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즐겁고 노예 같은 마음의 완악함이 풀렸을 것이다. 율법폐기주의자인 탕자도, 율법주의자인 맏아들도 모두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해했다. 자기들의 생각으로 아버지를 해석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이거나 속박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1~4).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율법을 써 주신 결과로서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버거운 짐(의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이것이 복음의 매로우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복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9장 확신의 매로우

1721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매로우 형제들에게 했던 질문(12개중 8) :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분이 나의 구주시며, 그분이 행하고 고통당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지식과 믿음, 확신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분께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인가? 아니면 이 지식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행위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인가?”

과연 확신할 수 있는가? 그 확신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확신하는가?

 

거짓 확신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바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기꺼이 순교를 해도”(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없을 수 있다. 반대로 진정한 신자도 의심에 시달릴 수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1720년대 이전, 아니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거짓 확신’(산상수훈)확신의 부족’(서신서)을 모두 이야기 하고 있다.

교회사에서 대그레고리오 1세 이후 구원 확신은 지기중심적, 자기 몰두적인 삶의 구실로 삼을 수 있고, 자칫 율법폐기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했다. 중세에는 재량공로에서 적정공로에 이르러 완전한 칭의를 얻도록 돕기 위해 은혜를 형식화하고 객관화한 구원의 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언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만큼 의로워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따라서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결론은 낳게 된 이유는 만일 구원의 확신이 사실이라면교회의 권위(장황한 성례 불필요)를 축소시키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확신의 재발견에서 출발하였는데, 종교개혁자들에게 확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칼빈은 성령이 우리의 머리를 향해 밝혀 주시고 우리의 가슴에 인을 치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여,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아는 지식으로 정의한다면 제대로 정의한 셈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믿음을 기술함)

청교도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81, 신자들은 자신이 은혜의 상태 아래 있다는 것을 이생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 (‘확신을 기술함)

 

이러한 확신은 모두가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확신은 믿음의 본질인가?

-183,(요리문답81) 은혜와 구원이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도 이 확신을 얻기까지 오래 기다릴 수 있다.” 이 절대적인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도 이 확신에 참여하기 전까지 오래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존 로저스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고, 내가 그분의 수단으로 생명과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하신 모든 일이 곧 나를 위해서 하신 것이라는 내 마음의 특별한 확신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자기를 힙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니) , 그리스도는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

구원의 확신=반사 행위: 자신을 겨냥 즉,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칼빈은 믿음에 관한 지식은 이해라기보다는 확신에 있다. 우리는 확신의 굳음과 변함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하고 굳은이라는 표현을 더했다. 구원의 확신은 악()과 죽음(사망)에 대해 자신 있게 승리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실제적인 경험은 전혀 다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갈 때 신자들은 자주 불안의 시험을 받을 뿐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반복적으로 흔들린다. 신자들은 자신의 불신과 계속해서 싸운다. (=신자인) 모든 인간 속에 언제나 믿음과 함께 불신이 섞여 있다는 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자신의 약함과 싸우면서 불안의 순간에도 믿음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은 이미 꽤 승리는 거둔 것이다.”

이는 신자의 실질적인 삶, 특히 육과 영의 충돌을 보면 신자는 정의 그대로의 믿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더는 육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미already 아직not yet] 이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아직 육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한 믿음의 정의와 신자의 실질적인 경험(확신)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극심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무지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천성적으로 불신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시험이 우리를 맹렬히 공격한다. 믿음의 뿌리는 신실한 가슴에서 절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수없이 공격을 당해도 믿음은 결국 온 세상을 이긴다.”(기강3.2.4,20,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3이 믿음은 약하거나 강한 정도가 다르고 여러 모양으로 공격을 당해 약해질 수는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국 승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 모양으로 자라 완전한 확신에 이른다.이러한 확신을 돕는 성화의 역할에서 알 수 있는데 성도들은 자신의 무죄와 의를 기억함으로써 강해지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성도들은 양심의 깨끗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고 거기서 기뻐할 이유를 찾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vs 칼빈

칼빈은 확신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하지만, -민 신앙고백 작성자들은 확신이란 주제에 한 장을 통째로 할애했다. 칼빈과 청교도, 둘은 서로 다른 두 관점에서 확신의 주제를 바라본 것이다. -민은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보스턴은 현대신학의 매로우가 개혁신학의 전반적인 전통과 일맥상통한다고 판단, 그런 이유로 그 책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상충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믿음의 본질에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이 완전한 확신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직접적인 행위구원의 확신이라는 반사적인 차이를 목회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믿음이 약하고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믿음의 씨앗을 찾아 성경의 원칙에 따라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거나 불안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 확신은 상상할 수 없다. 신자들은 자신의 불신과 계속해서 싸운다. 신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달콤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인식하고 씁쓸함을 느끼며 생명에 대한 기대에 기뻐하는 동시에 죽음에 몸서리를 치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분열을 느낀다. 이런 차이는 믿음의 불완전에서 나온다. 현생에서는 불신에서 완전히 치유되어 전적으로 믿음으로 가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충돌이 발생한다. 육의 잔재 속에서 잠자고 있던 불신이 일어나 내면에서 잉태된 믿음을 공격하곤 한다.믿음의 신학은 단순(單純)하지만, 확신을 경험하는 일은 복잡(複雜)하다.

 

 

10장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구원의 확신이 되는가?

(= 직접적 행위) (= 반사행위)

확신은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매로우 형제들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였다.

네오피투스 : 제가 믿음 안에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을 꼭 알고 싶습니다.

에반젤리스타 :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확고한 기초 위에 믿음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 약속을 굳게 믿으십시오. 직접적인 행위로서의 믿음에서 나오는 확신입니다. 믿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확신을 얻게 됩니다.

네오피투스 : 제가 그렇게 했는지 확신할 방법은 없을까요?

에반젤리스타 : , 무슨 말씀인지 이제 알겠군요.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당신이 믿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원하는 것 같군요.

네오피투스 : 맞습니다. 바로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개혁신학은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와 반사행위로 구분한다.

네오피투스직접적인 믿음의 행위를 믿었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직접적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반사행위).

보스턴은 우리가 확신을 얻는 것이 성령의 3차원 사역 덕분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특히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우리 영혼에 비추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삶 속에서 칭의와 성화가 믿음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해 주신다.

때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혼과 함께 증언하신다.

 

그리스도와 믿음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열매. 실제로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해 그분께로 오는 모든 이를 구원하실 수 있고 또한 구원해 주신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확신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믿음의 행위는 그 안에 확신을 품고 있다. 믿음의 출발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다. 신자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에는 분명 확신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

네오피투스는 스스로 신자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확신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스스로 자기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신자인지 알 수 있는가? 자기 인식의 문제 곧 반사행위 문제이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이런 올바른 자기 인식(=내가 거짓신자가 아니라 참된신자) 세 가지 차원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며, 이해를 통해 자란다. 확신은 은혜,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고 그분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칭의, 입양, 중생에 대한분명한 이해 위에서 자라난다.

 

확신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적() : 3가지

첫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우리의 타고난 성향 때문에

둘째,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신 성부께 값없이 의()를 얻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함

셋째, 칭의가 최종적이고도 완전하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

확신의 문제에서 그리스도는 핵심이요, 전부(全部)가 되신다. 믿어 순종”(1:5,16:26), 곧 믿음의 확신만큼 순종의 삶이 따른다. 사도요한도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요일5:13)”이라고 했다.

 

요한은 신자의 삶에서 확신을 강화하는 네 가지 도덕적 특징을 설명

1)하나님의 계명에 순종 : 요일5:1~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2)의로운 삶 : 진정한 믿음은 의로운 삶으로 증명 요일2: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3)죄를 짓지 않는 삶 :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4)사랑하는 삶 :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믿음의 확증에 관하여

네오피투스: 제게 아무런 외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제게 내적 증거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진정으로 믿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반젤리스타: 실제로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먼저, 당신이 믿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 순종하려고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급하게 확신을 짜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내적 증거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원한다. 하지만, 보스턴은 <그리스도를 더 확실히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분명한 확신에 이르기 위한 세 번째 차원 : 성령과 믿음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는 성령의 열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니라”(고전13:3)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8:16~18)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그래서 이제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존 오웬의 증언을 들어 보자.

(법정에서) 성령이 오셔서 이 점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신다. 영혼은 자기 양심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 앞에 선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 그러는 동안 사탄도 최대한 반론을 펼친다. 그리고 죄와 율법이 그를 돕는다. 영혼의 증거에서 많은 흠을 찾아내어 그 증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영혼이 위기에 처한다. 이런 주장과 반론의 한복판에서 보혜사가 오셔서 약속 등의 말씀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확신을 그 마음에 주신다(그리고 모든 반론을 물리치신다).

8:16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나니”, 4:6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녀답게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성령은 효과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논쟁이 오래 가기도 하고, 변론이 몇 년을 가기도 한다. 또 때로는 율법이 이긴 것처럼 보이고, 죄와 사탄이 기뻐하는 것 같다. 불쌍한 영혼은 자신의 상속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능력에 약속의 말씀까지 갖추신 성령이 모든 당사자를 앞세워 논쟁을 끝내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문제에서 우리 영의 증언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의식이 약하고 확신이 부족할 때 성령이 함께 증언해 주신다는 것이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주체는 분명 신자이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실 때에만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없어도,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크라조, 날카로운 부르짖음)은 위급한 순간 울부짖는 외침으로 이것은 불신자의 의식 속에는 없다. 오직 절박한 신자의 본능을 표현한 외침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울 때 같은 영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최악의 순간에도 신자의 의식이 불신자의 의식과 완전히 다르다(존 머리).

 

성령의 증언(=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음)과 성령의 열매(=구원의 확신)가 같지는 않지만, 둘은 항상 같이 나타난다.

바울은 신자를 육신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고, 육신의 죄를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성령의 증언은 우리 영의 공동 증언으로서, 아들 됨에 대한 우리의 의식(그 의식이 저 밑바닥에 있다 해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의 증언은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와 별개로 나타나지 않는다. 8:12~14에서 죄를 죽이는 삶은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하심과 연결한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다. 성령은 결코 근거 없는 확신이나 비합리적인 결론을 낳는 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대신 이미 존재하는 근거들에 진정한 무게와 타당성을 부여하여 진정한 결론과 확신으로 인도하신다.”

이렇게 여러 가지 영향이 하나로 합쳐져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이룬다. 실제 확신에는 신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분명한 교리가 정립되었다 해도 여러 장애물들로 인해 <실제 확신을 경험하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