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믿음의 확증에 관하여

초신자 혹은 새신자들, 혹은 믿음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진 자들이 갖는 의심의 증상들이 있다. 

 

믿음의 확증에 관하여

네오피투스: 제게 아무런 외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제게 내적 증거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진정으로 믿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반젤리스타: 실제로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먼저, 당신이 믿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 순종하려고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급하게 확신을 짜내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확실한 (내적) 증거>를 원한다.

대부분의 많은 간증자들이 말하는 그것이 믿음의 증거이고 구원의 확신인가? 

먼저는 성경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하고,

또 그러한 확증들이 모두 성경적인 것인지, 

또 모두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적 확신(증거)를 찾으려 하기보다 <그리스도를 더 확실히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명한 확신에 이르기 위한 결정적인 차원

 성령과 믿음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내 안에 맺어주신 열매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니라”(고전13:3)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6~18)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그래서 이제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한다.

우리의 어떤 조건 때문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 구원의 확신을 갖게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령이 그 공로를 우리로 믿게 하실 때이다. 

오웬의 증언을 들어 보자.

“(법정에서) 성령이 오셔서 이 점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신다. 

(우리) 영혼은 자기 양심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 앞에 선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 

…그러는 동안 사탄도 최대한 반론을 펼친다. 

그리고 죄와 율법이 그를 돕는다. 

그리고 사탄과 죄와 율법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우리) 영혼의 증거에서 많은 흠을 찾아내어 그 증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영혼이 위기에 처한다.

(그 때)   이런 주장과 반론의 한복판에서 보혜사가 오셔서 약속 등의 말씀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완벽한 확신을 그 마음에 주신다(그리고 모든 반론을 물리치신다). 

롬8:16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나니”, 

갈4:6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녀답게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신다. 

성령은 효과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논쟁이 오래 가기도 하고, 변론이 몇 년을 가기도 한다. 

또 때로는 율법이 이긴 것처럼 보이고, 죄와 사탄이 기뻐하는 것 같다. 

불쌍한 영혼은 자신의 상속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능력에 약속의 말씀까지 갖추신 성령이 모든 당사자를 앞세워 논쟁을 끝내신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문제에서 ‘우리 영’의 증언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만일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꼭둑각시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의식이 약하고 확신이 부족할 때 성령이 함께 증언해 주신다는 것이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주체는 분명 신자 자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게 된 데에는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실 때에만"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적으로 의식할 수 없을지라도,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오직 하나님만 찾게 만드신다.

그 때에 부르짖는(헬/크라조, 날카로운 부르짖음)다.

너무나 위급한 순간 울부짖는 외침이다. 

이것은 불신자의 의식 속에는 없는 것이다. 

오직 절박한 <신자의 본능을 표현>한 외침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백하는 사람은 어려울 때 같은 영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최악(어떤 영적 침체나 미끄러짐)의 순간에도 신자의 의식이 불신자의 의식과 완전히 다르다(존 머리).

 

성령의 증언과 성령의 열매가 같지는 않지만, 둘은 항상 같이 나타난다. 

성령이 아니면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이미 성령께서 그러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바울은 신자를 육신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고, 육신의 죄를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성령의 증언은 우리 영의 <공동 증언>으로서, 아들 됨에 대한 우리의 의식(그 의식이 저 밑바닥에 있다 해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의 증언은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와 별개로 나타나지 않는다.

롬8:12~14에서 "죄를 죽이는 삶"은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하심"과 연결한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다. 

성령은 결코 근거 없는 확신이나 비합리적인 결론을 낳는 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대신 이미 존재하는 근거들에 진정한 무게와 타당성을 부여하여 진정한 결론과 확신으로 인도하신다.”

이렇게 여러 가지 영향이 하나로 합쳐져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이룬다.

 실제 확신에는 신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도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분명한 교리가 정립되었다 해도 《여러 장애물들》로 인해 <실제 확신을 경험하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