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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vs 칼빈

칼빈은 <확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았지만, 웨-민 신앙고백 작성자들은 확신이란 주제에 한 장을 통째로 할애했다. 칼빈과 청교도, 둘은 서로 다른 두 관점에서 “확신”을 주제를 바라 보았다. 

칼빈시대에는 로마카톨릭의 쓰레기같은 교리와 싸웠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참된 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웨-민은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구원> 확신을 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이는 구원확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이 종종 현실적으로 구원확신에 이르는 과정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구원 확신을 얻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보스턴은 『현대신학의 매로우』가 개혁신학의 전반적인 전통과 일맥상통한다고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그 책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상충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믿음의 본질에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믿음이 완전한 확신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직접적인 행위와 구원의 확신이라는 반사적인 차이를 목회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믿음이 약하고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믿음의 씨앗을 찾아 성경의 원칙에 따라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일말의 의심도 없거나 불안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 확신은 상상할 수 없다. 

 신자들은 자신의 불신(의심)과 계속해서 싸운다. 

 신실한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달콤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인식하고 씁쓸함을 느끼며 

 생명에 대한 기대에 기뻐하는 동시에 죽음에 몸서리를 치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분열을 느낀다. 

이런 차이는 믿음의 불완전에서 나온다. 

현생에서는 불신에서 완전히 치유되어 전적으로 믿음으로 가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충돌이 발생한다. 

육의 잔재 속에서 잠자고 있던 불신이 일어나 내면에서 잉태된 믿음을 공격하곤 한다.”

믿음의 신학(믿음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단순(單純)하지만, 구원 확신을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복잡(複雜)하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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