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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매로우(핵심쟁점)

1721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매로우 형제들에게 했던 질문(12개중 8)

1.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2. 그분이 나의 구주시며,

3. 그분이 행하고 고통당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지식과

4. 믿음,

5. 확신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6. 그분께 관심을 가지며

7.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인가?

8. 아니면 이 지식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행위의 본질에 속하는 확신인가?”

 

- 우리는 과연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가?

- 그 확신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확신하는가?

 

거짓 확신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바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기꺼이 순교를 해도”(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없을 수 있다.

 

반대로 진정한 신자도 의심에 시달릴 수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1720년대 이전, 아니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거짓 확신’(산상수훈)과 ‘확신의 부족’(서신서)을 둘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사에서 대그레고리오 1세 이후 《구원 확신》은 지기중심적, 자기 몰두적인 삶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칫 율법폐기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중세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회 나름대로 <재량공로에서 적정공로>에 이르러 완전한 칭의를 얻도록 돕기 위해 은혜를 형식화하고 객관화한 구원의 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언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만큼 ‘의로워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카톨릭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비성경적인 결정을 한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까?

 이러한 결론은 낳게 된 이유는 ‘만일 구원의 확신이 사실이라면’ 교회의 권위(장황한 성례 불필요)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이 만든 교리

네가지 공로(功勞)

법정공로(Strict Merit) : 각자의 선행에 대해서 정확하게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공로.

적정공로(適正功勞, Condign Merit) : 각자의 선행보다 조금 보너스를 얹어서 상을 주시는 공로.

재량공로(載量功勞, Congruous Merit) : 고해성사의 보속행위로 인해서 상을 주시는 공로.

    * 고해성사 네 단계 : 1)통회 2)고백 3)사죄 4)보속

여분공로(Supererogatory Merit)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잉여 선행을 해서 남는 공로. 이 공로는 남에게 주어서 연옥에 있는 사람을 빨리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 여분공로를 팔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은 면죄부를 발행

카톨릭은 이같이 성경과 배치되는 인본주의적인 교리를 마구 생산해 내기에 이른다. 

카톨릭은 구원의 확실을 불확실성으로 남겨두어 자신들이 교회에서 행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유지할 수단, 신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가?

그런 "쓰레기 교리"는 치워라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일본학자가 번역한 것이다.

우리는 신앙개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말한다.

이 “확신”의 재발견에서 종교개혁이 출발하였는데, 종교개혁자들에게 확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칼빈은 “성령이 우리의 머리를 향해 밝혀 주시고(성령의 조명하심)

우리의 가슴에 인을 치신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여(인치심),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아는 지식(믿음의 확신)으로 정의한다면 제대로 정의한 셈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믿음’을 진술)

이 부분을 청교도들의 진술은 어떠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1,

“신자들은 자신이 은혜의 상태 아래 있다는 것을 이생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 (‘확신’을 기술)

그렇다.

신자가 만일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확신을 단번에 얻거나, 믿는 순간부터 얻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단번에 모두가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확신은 믿음의 본질인가?

-183,(요리문답81)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도 이 확신을 얻기까지 오래 기다릴 수 있다.”

이 절대적인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도 이 확신에 참여하기 전까지 오래 기다리고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존 로저스느 이렇게 정의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고, 내가 그분의 수단으로 생명과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하신 모든 일이 곧 나를 위해서 하신 것이라는 내 마음의 특별한 확신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구원의 확신 구분된다.

먼저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직접적인 행위

                                                      (자기를 힙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니)

, 그리스도는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

이에 반하여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의심할 수 있다.

구원의 확신은 반사 행위이다. 자신을 겨냥 즉,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칼빈은 “믿음에 관한 지식은 이해라기보다는 확신에 있다.

   우리는 확신의 굳음과 변함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하고 굳은“이라는 표현을 더했다. …

   구원의 확신은 악(惡)과 죽음(사망)에 대해 자신 있게 승리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

   (그러나) 신자들의 실제적인 경험은 전혀 다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갈 때 신자들은 자주 불안의 시험을 받을 뿐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반복적으로 흔들린다.신자들은 자신의 불신과 계속해서 싸운다. …

(=신자인) 모든 인간 속에 언제나 믿음과 함께 불신이 섞여 있다는 점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자신의 약함과 싸우면서 불안의 순간에도 믿음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은 이미 꽤 승리는 거둔 것이다.”

이는 신자의 실질적인 삶, 특히 육과 영의 충돌이 발생한다.

참된 신자도 처음부터 단번에 <정의 그대로의 믿음 : 믿음에 대한 정의>을 경험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더는 <육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미already –아직not yet]

이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아직 육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악이 활개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혹하는 사탄의 활동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으로부터 베드로처럼 자신이 사탄의 생각에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종종 넘어짐을 경험할 때 나는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한 믿음의 정의와 신자의 실질적인 경험(확신)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극심한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무지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천성적으로 불신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시험이 우리를 맹렬히 공격한다.

… 믿음의 부리는 신실한 가슴에서 절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 수없이 공격을 당해도 믿음은 결국 온 세상을 이긴다.”(기강3.2.4,20,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3절은 기 이유를 이렇게 진술한다. 

“이 믿음은 약하거나 강한 정도가 다르고 여러 모양으로 공격을 당해 약해질 수는 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국 승리한다. …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 모양으로 자라 완전한 확신에 이른다.”

이러한 확신을 돕는 성화의 역할을 이해하여야 한다.

“성도들은 자신의 무죄와 의를 기억함으로써 강해지고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성도들은 양심의 깨끗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고 거기서 기뻐할 이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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