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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에 대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신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그 은혜가 율법이 요구(온전한 순종)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랠프 어스킨)

 “율법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복음은 그렇게 할 힘을 준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이루신 것을 보고, 그의 용서하시는 음성을 들으면, 

노예가 자녀로 변하고 의무가 선택으로 변하네.”

율법주의나 율법폐기주의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시각만이 아니다.

또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율법폐기주의는 궁극적으로 율법과 복음 모두에서 나타나는 ①《은혜》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은혜 이면에 있는 ②《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다. 

율법에는 특별조치법으로 주신 은혜가 있다. 

은혜는 율법을 지킬 능력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긍정적인 기능과 부정적인 기능이 있는데,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불손종하는 자에게는 심판이다. 

율법,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 안에 있는 "죄"가 문제이다.

죄는 언제나 신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감추고자 한다.

"네가 꼭 잘못한 것만은 아니야, 그래 너도 잘하고 있어! 넌 충분히 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잊고 무관심하게 만든다. 

 

바울은 “율법주의, 율법주의자, 율법적인, 율법폐기주의”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해 폄하하는 것 같은 표현들은 율법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롬7장 전체가 율법의 ’본질과 역할‘을 설명하는데, 《죄(罪)》는 율법으로 드러난다(7절중).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을 품고 있다. 

율법은 생명을 약속(이것을 하면 살리라)했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율법(律法)이 아니라 죄(罪)다. 

죄가 율법을 죽음의 도구로 바꾸었다(10절)

 

율법을 주신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

율법은 본래 ’거룩하고 선하고 신령‘한 것이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조화를 이룬다. 

즉, 성령 안에서 우리는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한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사랑하고 이루셨다(율법을 지키셨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시고, 율법을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 

사랑은 율법(계명 곧 십계명)의 완성이다(롬13:10).

계명이라는 철로 위에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기관차가 달린다. 

사랑이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고, 

율법은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둘은 상호의존적이며 별개로 작용할 수 없다.

 

구속역사라는 배경 속의 율법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종교법 혹은 의식법) : 대신관계, 

그리고 백성간의 관계(시민법) : 대인관계를 이끌 율법을 주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받는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통제할 계명들(십계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힘과 동기를 주신다. 

이와 같이 율법과 은혜는 서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의 법에서 임시적(한시적=제사법 혹은 의식법)이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 

시내산 언약이 교회에 대한 구속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의 점진적 계시는 이전 계시를 반복하고 확장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 요구하는 의식법을 완성하였고(엡2:15~16), 

시민법(이웃을 사랑하라)의 종말을 고했다(골2:14~17).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시민법은 완성되었다. 

또한 도덕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롬8:3~4). 

단, 이 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우리 안에서 계속 완성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율법의 ‘마침 목적(텔로스)’을 본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롬13:8~10, 엡6:1 등에서 《율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어겼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의식(제사)을 마련해 주시고

계명들을 통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방향을 알려 주셨다. 

그들에게 율법은 삶의 규칙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율법을 삶의 규칙으로 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속박된 삶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적용하려 할 때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모두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로 여기지 않으셨다. 우리들도 그렇다.

 

두 형제 이야기

먼저는 율법폐기주의자인 탕자(우리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서 율법주의의 유혹을 받는다. 

“아버지의 집에 가서 종이 되어야겠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용서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고, 순종적인 아들로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

율법주의자인 형은 아버지의 은혜를 맛본 적이 없다. 

율법주의에 물든 탓에 그는 아들로서의 특권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는 은혜》를 제시했다. 

형이 아버지의 은혜를 받아들였더라면 매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즐겁고

노예 같은 마음의 완악함이 풀렸을 것이다. 

율법폐기주의자인 탕자도, 율법주의자인 맏아들도 모두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해했다. 

자기들의 생각으로 아버지를 해석했던 것이다. 

율법주의도 율법페기주의도 모두 은혜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이해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이거나 속박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율법을 써 주신 결과로서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버거운 짐(의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이것이 복음의 매로우(핵심)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복음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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