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어떻게 일어나는가?
시편 80편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거룩한 부흥을 기대합니다.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지 부흥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신앙부흥은 창세기 야곱의 신앙 부흥이 그 시작입니다.
창세기의 신앙부흥 창세기 35장 1절에서 15절 사이에 나오는 야곱의 집안의 신앙 회복은 참된 부흥의 성경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디나의 시건으로 앞이 캄캄했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작성해 보십시오.
제1장 구약을 보는 새로운 시각
제2장 벧엘로 올라가라
1. 본문 배경
2. 당시 야곱 집안의 영적 상태(창 34:1-31)
3. 맺는말
제3장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1. 단을 쌓으라(창 35:1)
2. 너는 하나님께 벧엘에서(창 35:1)
3. 맺는말
제4장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1. 영적 각성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
2. 시각
3. 영적권위의 회복
4. 맺는말
제5장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1. 본문의 정황
2. 이방 신상을 버리고(창 35:2)
3. 정결케 하고(창 35:2)
4. 의복을 바꾸라(창 35:2)
제6장 두렵게 하시는 하나님
1. 예배적인 고찰
2. 본문의 정황
3. 공동체를 권세 있게 하는 하나님의 부흥
4. 교회의 모습에 대한 감상주의적 이상과 위험성
5. 교회가 놓여 있는 현실의 영적 정황과 이상
제7장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1. 본문의 진정성
2. 단을 쌓고(창 35:6)
3. 드보라의 죽음
4.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8장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1. 언약의 확인(창 35:9)
2.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35:11)
제9장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1. 하나님이... 떠나 올라가시니라(창 35:13)
2.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창 35:14)
우리 시대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부흥을 목말라하지 않는다"는 것과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부흥을 통해 사람들을 일깨워 왔습니다.
부흥을 기대한다면 과거에 있었던 부흥의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몇 가지 공통점과 교훈을 얻게 됩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앙 부흥에는 《전조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기 전 후덥지근한 습합과 하늘이 붉게 물들여집니다.
1. 탄식하는 소수의 사람들
대각성(大覺醒, Great Awakening)/ 제1차 운동 (1735-1755)은 미국 중부로 이민 간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야외 성찬예배(성만찬)를 통해 공동체 활동 속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신앙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739년 12월에 조지 휫필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버지니아에서 Reading House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 그룹 사람들이 장로교인이 되었고, 1747에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장로교회가 많이 개척되었다.
제2차 운동 1790-1840, 제3차 운동 1850-1900, 제4차 운동 1960-1981가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1800년대에 위대한 각성, 웨일즈의 부흥, 1906년 아주사(Azusa)의 부흥, 그 외의 어떤 부흥
을 살펴보더라도 거기에는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서, 또 교회에서 현상 유지에 급급하는 것을 답답해하며 탄식하며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으며 그 기도는 놀라운 부흥을 낳았고, 또 부흥은 기도에 불을 붙였다.
이는 마치 시편 80편에서 아삽이 그 시국, 깨진 성벽, 들짐승들의 출몰, 불탄 포도원을 보면서
슬퍼했던 것과 같다.
그는 이어 18절에서 "우리를 소생(부흥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간구한다.
"성령은 기도의 영이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할 때라야 우리는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을 필요로 하게 된다. 운전 중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와 간구와 중보를 올려드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우리 교회가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예배당에 사람이 꽉 찬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천사들이 이런 상황을 보며 뭐라고 이야기할까?
“아, 예배당 의자가 이렇게 근사할 수가 있을까?
이곳 하늘에서 우리는 몇 년째 의자 칭찬이란다.
예배당 조명은 또 어떻고 아주 황홀해, 강단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놀랍게 만들었어....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왜 천국을 가려하는가?
거기서는 주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천국은 우리에게 천국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사람을 왜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시겠는가?
우리가 선행이나 기도나 다른 경건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지 말자.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그를 사랑하고 말씀에 청종하며 찬양드리는 곳이다.
나는 여러 목사님들과 이야기해 보았다. 그들 중에 유명하고 "성공적"이라는 분들이 내게 개인적으로 고백했다. "목사님, 이거 사실인데요
우리 교회에서는 정말 기도회라는 것을 가질 수 없어요 너무 사람이 적어서 부끄러워요
누가 와서 강연하거나 공연하거나 발표하는 일이 아니면 사람들이 안 와요 나는 단지 한 시간 예배,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는 그들을 잡아두지 못합니다."
이렇게 숫자를 따지는 종교가 성경에 나와 있는가? 예수님도 그 백성 가운데 큰 무리를 잡아두지 못했다.
영적인 결과보다는 사람 수나 건물 크기로 사역의 질을 측정하려는 처사는 비극이다.
내 자신이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설교 자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 묘한 형태의 공연이 되기 쉽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는 내가 명석한 웅변가였나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책을 썼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다만 아담 이래로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한 사역자들의 반열에 계속 서
있었는가를 물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