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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말하는 도에 관하여

[明泉] 맑은 샘물 2022. 12. 12. 23:42

동양사상, 동양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단연 노자이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말기로 대략 BC 5~6세기 인물이다. 공자와 같은 시대 인물이며, 공자가 그를 찾아가 진리를 논한 것에 대해 공자가 제자들에게 노자에 관해 말했던 것이 남아 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소크라테스(BC470년 경~399년 5월 7일) 보다 조금 앞선다. 소크라테스는 그보다 앞선 이전 시대의 자연철학이 중심이었으나, 그는 소피스트들이 인기있는 직업으로 활동하던 시대에 였으며 서서히 인간철학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동양사상의 바탕이 되는 태호복희의 사상을 기초로 노자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노자가 자연철학의 마지막 인물이고, 같은시대 공자가 인간철학의 시조이다.
그의 가르침을 『노자』 혹은 『노자도덕경』으로 약 5,000글자 81장으로 되어 있다. 상편 37장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상권 도경의 제1장은 노자의 도(道)사상을 총괄적으로 언급한다. 노자는 도(道)를 철학적 관점 곧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제1장

[해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 地之始 有名萬 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 지지시 무명만 물지모)
첫구절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만일 본래의 <도(道)>를 인간이 사용하는 말(언어)로 이름을 붙이면,
본래의 <도>는 축소 혹은 변형 또는 약화되므로
본래의 <도(道)>가 아니다.
본래의 도를 가리키려고 이름을 도라고 붙였을 때(명명),
그 붙여진 도가 본래의 도와 항상 같은 것이 아니다."
만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라면 그 도는 본래의 도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말)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이며 근원인데, 어찌 <도>라는 글자 하나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붙여진 그 이름은 <영원한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도)은 존재하지만,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우리는 그것을 '도'라고 명명한다. 다른 표현이 없어서)
그것은 우주(하늘과 땅)의 기원이다.
그것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자(어머니/양육자)이다.
영원한 그것 피조세게에서는 "도"라고 명명할 뿐이다.
* 영원 속에서 볼 때 그것(도) 아직 피조물이 없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 그러나 그것이 피조 세계를 낳았고, 그것에 의해 피조 세계가 존재하므로
피조세계에서 볼 때 그것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어머니(양육자)이다.

도(道)의 실체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라.
도(道)는 모든 것의 근본(根本)이요,
원리(原理)요,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도(道)는 실체(實體)이다.

도(道)는 설명이 어렵다
분명 도는 존재하는데, 그 도를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이 ‘도(道)’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이 도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도라고 말한 글자(유명)가 도 자체를 담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로 "도(道)"를 말하는 순간 그 "도(道)"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본질의 도(道)는 언어로 설명하거나 명명하기에 너무 광대함 때문이요,
언어는 제한적이고 축소적이기 때문이다.
어찌 형이하학의 언어로 형이상학을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道)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본래의 도(道)는 우주보다 크다.
도(道)는 우주의 근원이며 시작이다. 또 우주는 도(道) 안에 있다.
노자는 이처럼 본질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질인 도(道)를 터득하고,
그 도(道)를 따르는 사람이 덕(德)의 사람이다.
- 노자의 도경 전체를 보아도 만물의 근원이며 기원인 도(道)가 인격적 존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도는 분명 존재하는 그 어떤 실체이고, 인간이 그 도(道)를 따를 때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 왜 우리는 사물의 본질(내면)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외면)만 보이는가?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비뚫어진 <욕망> 때문이다.
욕1망을 내려놓으면 우주의 감추어진 진리가 보게된다.

故常無欲 而觀其妙 常有欲 而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그러므로 늘 욕심에서 벗어나 있는 자만이 오묘(其妙)함을 볼 수 있다. 즉 그는 숨겨진(감추인) 본질을 본다. 늘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 '요(徼)'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묘(속)와 요(겉)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오지만 이름이 다르다.
이 본질의 '근원'이 나오는 곳을 '현(玄)'이라 한다.
이 그윽하고 놀라운 <현> 모든 신비(묘)들이 나오는 문이다.

이것이 노자시대까지 인간의 이성으로 찾아낸 진리에 관한 탐색의 최고봉이다. 또한 이 때까지 도가 인간에게 계시된 영역이다. 그가 우주 만물에 관해 깊게 연구했고, 이를 통해 만물의 '도'의 이치를 깨닫고 정리하였다. 결론적으로 그 도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인간의 참된 삶이며 도리인데, 노자가 '무위자연'의 사상가라는 주장을 하면 노자가 화낼 일이다. 또한 노자는 도가사상을 창시자가 아니다. 그는 동양사상의 마지막 자연철학자였기 때문에 자연철학에서 발견한 궁극적 존재를 "도"라고 밝힌 것 뿐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깨끗한 자-물욕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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