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刹那)와 영원(永遠)
순간 속에 영원이
찰나(刹那), 찰나는 인도의 고어인 '크샤나'(산스크리트어: क्षण, kṣaṇa) Ksana의 음역이다. '찰나나 차나'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일념(一念)이란 뜻으로 번역한다.
《찰나》를 영원이라는 시간을 쪼개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짧은 순간의 표현이다. 시간의 단위로 환산하면 1/75초쯤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간 단위 중에서 가장 짧은 단위를 일컫는다. 우리가 종종 무슨 일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찰나의 순간에도 영원을 느낄 수 있고, 영원을 바라본다. 우리에게는 영원이란 느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맛볼 수 있다. 찰나는 영원 안에 있고, 영원은 찰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찰나는 인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순간"이라는 뜻이다. 이후로 불교에서는 극히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구백 년 앞서 모세는 이런 말을 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천년과 한 순간
기독교 역시 천년의 시간과 한순간을 비교하면서 우리 인생들에게는 천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한 순간인 것이다. 신에게는 영원한 오늘이라는 시간 밖에 없다. 즉, 시간 역시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며, 시간에 제약을 받고나 시간이나 공간이나 어느 것도 하나님을 제약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의 언약이 역사 이래로 언제 맺어졌건 간에 그 약속은 지금 우리들에게 곧바로 적용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약속의 받은 자요, 그 약속의 언약을 소유한 자들이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5~6)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복인가!
무엇으로 이 놀라운 복을 비교할 수 있으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기업이다. 여기에서 기업이란 몫, 소유, 유업을 말한다. 예수의 생명과 함께 우리는 유업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업이신 예수가 생명이요, 부활이요, 영생이요, 구원이시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 유업을 누릴 자들이다.
'기업(portion)'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435장에는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 의미하는 기업(基業)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사업이나 경제활동의 조직체인 기업(企業)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질 근본과 소망이라는 뜻이 포함된 《분깃》을 의미한다.
성도의 기업(엡 1:18, 골 1:12)이란 《영생》(마 19:29, 눅 10:25, 18:18)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마 5:5)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찰나의 순간순간을 살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이버지가 약속하신 영원을 바라보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간다.
435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음 몸" 가사처럼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안에 살리라." 찬양하며,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심을 믿으며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시기에 우리는 힘 있게 달려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