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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품, 개혁군주 정조 이산(李祘)

[明泉] 맑은 샘물 2023. 7. 31. 11:41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祘), 그는 비운의 왕자에서 조선 최고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왜 세종과 함께 "대왕"이라는 부르게 되었을까?
대왕이라는 그 말에서 짐작되듯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는 일을 하였다면, 정조대왕은 조선을 꽃피우고 빛낸 위대한 개혁군주였기 때문이다.

왕조의 역사

조선 초기 권력을 잡았던 훈구세력과 신진 사림파 세력이 대립했습니다. 이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붕당(朋黨)'이라 합니다. 특히 조선 중기에 권력을 잡았던 사림들이 서로 당겨주고 키워주면서 같은 정치적인 입장이나 학맥에 따라 만든 집단입니다. 대표적인 붕당으로는 지역에 따라 동인과 서인, 남인, 북인으로 때로는 정치적 입장 곧 주도적인 인물에 따라 노론, 소론으로 나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지역적 안배와 인재를 겨루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집권세력을 견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치적 생리입니다. 오늘날 정당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권력을 창출하고, 그 이익을 서로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노론과 소론

숙종과 경종 때에는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숙종의 후계자를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지지하는 온건파 소론과, 비록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지만 연잉군을 지지하는 강경파 노론이 왕위계승을 놓고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숙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경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였고, 1724년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소론정권하에서 있었으나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으면서 경종의 아우였던 영잉군(延礽君)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였습니다.
노론의 집권으로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급진 세력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며 정치적 갈등은 더욱더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즉위하여 초기에 정세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면서 자신의 왕위를 반대했던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합니다.
정조는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이루며 탕평정치를 이어갔으나 균형이 깨지고 노론이 힘이 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영조는 1737년(영조 13) 탕평을 이유로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발탁하였고, 그를 세자의 후견인 겸 스승임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영조 즉위 이후 강성해진 노론을 제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점점 격화되고 급기야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게 만드는 비정한 아버지가 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정조는 1762년(영조 38)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이 목숨 걸고 권력투쟁으로 왕권을 흔들고, 힘들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10세가 되어 죽고, 늦은 나이(42살)에 사도세자를 얻어 그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2살이 되자 그를 세자로 세웠고, 자신과 같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군이 되어주길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가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엄격한 교육과 세자가 아직은 어린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세자의 대리청정이 결정합니다.
사도세자가 정치 실습을 통해 탕평의 원리를 익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더 심화되면서 세자에게 덕선과 질책과 정신적 학대를 가하게 됩니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얻게 되고, 결국 기행과 비행을 일삼다가 27세의 나이에 뒤주 안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고통스럽게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정조의 즉위

조선후기 제22대 왕 위에 오른 정조(재위 기간은 1776~1800)는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규장각(奎章閣)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 갔습니다. 그는 미국 아브라함 링컨보다 60년 앞서 관노 6만 명을 해방시킨 인물입니다.

동병상련

공노비는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소유이고, 내용적으로는 국왕의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노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17세기에는 인구 전체의 60%가 노비(노비도 정류가 매우 다양함)였는데, 전체 노비의 10% 정도가 공노비였습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시노는 온종일 뜰 위에 서서 상전의 명을 기다려야 했고, 수노는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건을 사들였다. 공노는 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고, 구노는 말을 기르면서 원이 나들이할 때 양산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방노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변소를 돌보는 일을 했으므로 방자라고 불렀다. 관노들 가운데 보수를 받는 자는 부엌에서 일하는 포노와 주노, 창노뿐이다”라고 안타까운 지방 관노들의 노역 실태를 기럭해 놓았습니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신분을 대물림하고 세습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신분 차별 제도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맞먹는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제21대 왕 영조를 낳은 숙빈 최 씨도 신분이 ‘나인(궁중에서 일하는 공노비)'이었습니다.  '최가 복순’. 그녀는 고아로 인현왕후의 시녀로 입궐하여 궁녀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고려·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나인의 세숫물 시중을 맡아보던 계집종)였습니다. 그 당시 공식 기록상 궁궐에 600여 명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슬 퍼런 장희빈(장옥정)과의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왕의 친모가 됩니다. 다행인 것은 영조와 정조 모두는  ‘노비도 백성이다’라는 근대적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뿐만 아니라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하였습니다.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실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요.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던 성군이었습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개혁군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히는 정조의 업적은 무엇일까요?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해 조정에서 벌이는 수많은 암투극과 암살까지 모두 눈으로 목격하며 처리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신하들의 정치집단으로 부터 자유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조선 팔도로 퍼트리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원에 지은 화성
《수원화성》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꿈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효심이 깊었던 그는 또한 1776년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애썼습니다.
그는 또한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에 민가와 관청 등을 옮길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축성하개 된 것이 바로 수원화성(水原華城)입니다. 새로 건축하는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로 평가받는 그가 한양에서 펼치지 못했던 꿈을 실현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거기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던 이 땅에 최초의 계획도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명콤비를 만나다

개혁군주 정조(正祖)와 다산 정약용을 만난 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둘 다 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군주들은 군주 하나를 위한 나라를 꿈꾸지만, 그러나 정신이 깨어있는 군주는 백성이 행복한 나라가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1. 정조와 다산의 만남
2. 정조의 개혁 정책
3. 정조의 위민정신과 다산의 과학 정신으로 만든 화성
현재의 수원시에 지은 화성(華城)은 역사적으로 의의가 매우 큽니다.
정조는 공사가 마무리된 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책을 펴내게 했습니다.
이처럼 정조는 화성 짓는데 필요한 공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게 해 놓은 덕분에 무너진 곳을 대부분을 원상으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조의 업적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군주, 그 어떤 왕보다 뛰어난 학자군주이자 개혁군주였습니다. 그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였고,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에 힘썼습니다. 특히 중앙으로 진출하는 인재들을 등용함에 있어《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실력 중심으로 인물을 선출하는 대통합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과 함께 정조의 치세기간은  황금시대라 불려도 손색이 없습니다.
부친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어린 정조는 풍수지리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풍수지리적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수원 화산(華山, 현 화성 융건릉)에 생부였던 장헌 세자의 능침을 옮기고,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동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신뢰할 만한 신하를 가까이 두어 자문을 두었는데, 그의 이상을 굳건히 뒷받침해 줄 조선 최고의 문신이라 할 만한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과 최고의 과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곁에 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는 정조가 고른 인재 등용을 위해 《신분 개혁》을 단행하고 사상개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입니다.
이러한 책은 정조의 정치와 리더십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책문(策問)> 은 국왕이 어떤 중요한 국정 사안을 놓고 이를 공개적으로 질문하고, 신하들로부터 자유롭고  대책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책문의 대상은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나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로 국왕이 친히 나서는 전시(殿試)에 응시한 선비들이었습니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에 속한 위탁교육생들이었던 ‘초계문신’들에게 집중적으로 책문을 내곤 했다.  

이 책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앞으로 함께 정치를 펼쳐 나갈 인사들과 함께 인재등용, 문예부흥, 민생과 복지, 균형발전 등 모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자 했던 기록이다. 대책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조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천재군주로도 이름 높았던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정조의 책문을 받은 신하들이 학문 정진에 더욱 박차를 가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는 “성이 튼튼하면 됐지, 왜 이렇게 아름답게 쌓느냐”는 신하들을 향해 “아름다운 것이 진정 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올바른 사상을 가진 정조의 효행심이 바탕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부흥을 위한 정치개혁 기반도시로서 축조된 곳입니다.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2월 8일> 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병법(兵法)에 상대방의 기를 먼저 꺾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소하(蕭何)는 미앙궁(未央宮)을 크게 지었고, 또 말하기를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성루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徒爲觀瞻之美, 而不念堅緻之方, 固不可, 而觀瞻之美, 亦有助於禦敵. 兵法貴乎先奪人之氣, 故蕭何大治未央宮, 亦曰: ‘非壯麗, 無以重威’ 然則城樓雄麗, 使觀者奪氣, 亦爲守城之大助. 懸眼之制, 或曰非甓城不可爲, 此則不然.]

수원화성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청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 등 4대 문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남쪽으로 향하는 팔달문(보물 제402호)은 조선의 모든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사통팔달’이라 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 보기
1. 나는 자기 발전과 성장을 위해 학문에 힘쓰고 있는가?
2. 나는 타인의 말(특히 조언)에 대해 경청하고 있는가?
3. 나는 인생과 내 삶의 고민을 터놓고 나눌 친구나 선배가 있는가?
4. 또 알고 있는 것, 확신하는 것을 실행할 능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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