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영원한 신비, 나 알 수 없어도 나 알아 가리라(2)

[明泉] 맑은 샘물 2023. 7. 22. 12:05

인류의 역사는 제사로부터 출발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제사를 가르쳤다.

제사는 그들의 범죄로 떠났던 하나님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다. 

신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 유일한 길은 오직 제사뿐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예배)는 "하나님, 곧 하늘의 신"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개역한글)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개역개정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禮拜/제사)하는 자(者)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지니라 - 개역개정 - 

 

예배(禮拜) = "신령(神靈)과 진정(眞情)"
영어로는 in spirit and truth.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영과 진리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예를 들면 손목시계이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으로 줄이 없이 덩그러니 시계 부분만 있다면 손목시계가 아니다. 

자동차와 연료(충전베터리)이다. 자동차만 있고 연료가 없다면 차는 무의미하다.

헬라어 문법 중 접속사 καί(카이)에 대한 문법으로 hendiadys(헨다이아디스)가 있다.

헬라어 ἕν διὰ δίς(헨, 디아, 디스)에서 온 것으로 직역하면 one through two이다.

카이가 연결하는 두 단어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 둘을 통하여 한 가지 의미를 표현한다. 

이를 문법으로는 중언법이라 하는데, 유사한 말이나 중첩되는 말을 연속 사용함으로써 강조하는 기법이다.

말의 흐름에 율동을 주어 사용하기에 편리한 장점도 있다. 

누가복음 2장 47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 ="슬기로운 대답">에 경탄하였다." 

이렇게 'A and B'에서 and(καί, 카이)가 hendiadys로 사용되었다면 'A가 B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든지, 'B가 A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법적으로 중언법은 요한복음 3장 5절 "물과 성령으로"에 적용해 보자.

각각의 개별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물과 성령"이지만, 중언법으로 해석하면, "물 같은 성령"이 된다.

요한복음 3:5의 "물 같은 성령"(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2) 역시 성령을 물과 연결 짓는 표상과 무관하지 않다. 

"물 같은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으로 물처럼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살리신다. 

물은 생명을 살리고, 물은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씻는 역할을 한다. 

 
영, 하나님의 신비

우리는 부득불 한자 문화권 안에서 한자의 뜻을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

신령 령(靈=비올 령 霝 + 무당 무 巫)

먼저 비 우(雨, rain)는 하늘(구름)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물론 비(rain)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려면 올라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바닷물을 불러 올려서 땅 위에 쏟으시는 그분을 찾아라”(암 5:8).

비 우(雨)가 홀로 쓰일 때에는 rain이다.

하지만, 여기에 무언가 추가되면 비와 같이 '내리는 것, 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요레'(3138 יורה )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아브라함은 곧 바로 세겜 땅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다(창 12:6).

그곳(모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창세기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히브리어 ‘모레’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이른 비’, ‘교사, 선생’이다.

‘모레’의 어원인 히브리어 동사 ‘야라’는 '① 던지다 ② 쏘다 ③ 가르치다'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모레’의 씨앗을 뿌렸을 때 씨가 자라도록 "내려주는 비"와

무지를 가르침으로 깨우쳐주는 ‘선생’을 의미한다.

채소나 풀에는 조용히 내려서 '촉촉이 적시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신명기 32장2절,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 채소 위에 <단 비>로다

호세아 10:12에서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가르치다’라는 동사 ‘야라’의 가장 중요한 파생어로는 ‘율법’을 뜻하는 <토라>가 있다.

이 명사는 구약성경(222회 사용)에서 ‘율법’, ‘법령’, ‘교훈’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비처럼 우리 마음을 적신다.

아브라함은 "갈 길을 모르지만,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고" 나아갔다.

그가 도착한 곳이 창세기 12:6의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어떤 성경은 ‘선생의 나무’(the teacher’s terebinth)로 번역했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이다. 

이같이 성경에서 지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 주신 것은 신비로운 섭리이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 주셨다.

또 그가 머무는 "가나안 땅과 상속자"를 주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이처럼 ‘모레’는 이스라엘에게 신성한 장소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장소였다.  

이처럼 히브리어 동사 יָרָה (야라)는교훈하다, 지시하다, 가르치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靈)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비가 내리도록 비는 무당을 상징했을까?

왜 신령할 령(靈)이라고 쓰게 되었을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