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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明泉] 맑은 샘물 2023. 7. 18. 16:30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Je pense, donc je suis (프) Cogito, ergo sum (라)]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사유(思惟)하고, 생각하면서 존재(실존)를 느낍니다.

 

사유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음

법정스님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결국 "깨달음=지혜의 마음"을 얻기 위함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와 삶의 목적은 찾아가는 길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기회마저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이 찾고자 했던 <나>

"나는 누구인가"는 역사 이래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를 꼽습니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이 말은 내가 나에 대해 무지함,
곧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끝임없이 사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고대나 중세는 신의 존재 안에서 나를 찾는 길이었다면,

근대에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찾는 길' - '나는 나 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위대한 과학적인 생각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 (프)Je pense, donc je suis. (라) Cogito, ergo sum ]
이 명제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은 무엇을 찾아냈을까요?
'나'라는 존재 안에서 '나'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861~1941)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확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경탄(敬歎)이다.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적확한 대답을 해 줄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구도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불완전하기에 좀 더 완전해지기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철학자 몽테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찌하면 내게 진정 나다워질 수 있는가는 아는 일’이라 했습니다.
진아(眞我), 참 나, 참 본성을 아는 것이라고들 말을 하지만,
이 또한 그 본질적인 진아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아직도 참된 나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나,
상황이나 환경에 끌려 다니는 겉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도자들은 겉사람은 날로  '후패(朽敗 : '썩어서 못 쓰게 된다', 썩어서 존재 가치가 없게 된다)하여져 가지만,
자기를 찾으려 고뇌하는 사람만 '속사람'은 날로 강건하여지며,
마침내 '참된 나'로 한걸음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쇼펜하우워는 ‘각개인은 타인 속에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갖고 있다’고 해 알 듯 모를 듯한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만일 홀로 산다면 철저히 자기만족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을 깨달아 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에서 찾는 '나'

이제 철학에서 생각하는 나에서 종교에서 보는 나로 넘어가 보려 합니다.
종교마다 <신존재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정의는 달라집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지성은 끊임없이 사유를 합니다.
마음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들,

사유함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이를 분석하고, 추리하고, 종합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큰 틀 안에서 분명 자신이 바라던 무언가를 잡으려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고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생로병사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결코 후회가 없는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분명한 그들이 추구하던 진리에 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났던 사람,
세상에 온갖 지식을 가졌던 사람,
모든 부귀영화를 가졌고 누려보았던 사람,
전도서 저자인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그러한 모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
세상은 수많은 영웅호걸, 열사들을 배출합니다.
그리고는 그들도 역사의 뒤꼍길로 사라집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인생무상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지혜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그 유한성과 그리고 거기에 속고 살아가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입니다. 전도서는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씻씩하게 잘 살아보려 하고 또 가치있게 살려고 하는 것, 그리고 허무주의와 절망을 박살내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잠언과 전도서》를 그 말씀을 음미하면서 백번쯤 읽어 그 말씀이 몸에 배이고, 입에 붙으면, 겨우 "인생론"의 첫 걸음마를 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두번째 질문에 답을 얻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무얼 위해 살아야" 한단 말인가?
솔로몬은 마침내 그가 전하는 "도"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전 12: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총명과 명철과 지혜가 사라지기 전),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치매가 오기 전)에 그리하라....
그리고,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창조주를 찾아야 함,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임,
마지막에 그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로 분명 수많은 신화들이 탄생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모두가 인간에 의해 가공되고, 만들어지고, 공교히 꾸며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진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진실>은 존재합니다.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내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우연히라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인간이 그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우연이라 말한 것뿐입니다.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는 것이 근대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과학이 밝히려는 것을 무시할 필요도 없고, 
과학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밝혀가는 것이기에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동양철학

동양철학은 <인간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仁) = 인간답게> 사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동양철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군자의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군자(君子)는 유교에서 '성품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지성인'을 말하는 것이지요. 
시전적 의미로는 '학문과 덕이 높고 행실이 바르며 품위를 갖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인간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을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 아(), "나"는 한자로 보면 손(手)으로 창(戈)을 들어 지키는 모양새입니다.  
손(手)에 창을 들고 있음은 내 몸 또는 우리를 지키기 위함이란 데서'나'라는 뜻이 됐다고 하지요.
일반적으로 자신을 말할 때 "我"(아)라 합니다. 

 

인도철학(종교)에서 나는 무엇입니까?

불교철학
그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에 비하여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현재는 순간뿐입니다. 
모두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나를 붙잡아 매어 둘 수 없습니다. 
모두 나라고 설명하는 것은 과거의 나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의미에서는 과거의 나도 나이고, 현재의 나도 나입니다. 
고타마 싯탈타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無我 (무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깨달은 ‘나'라는 존재는 오온에서 집착하지 않는 나 곧 무아일 때가 진짜 나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물질(몸뚱이, 色)이 있고,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정보가 드어오면 생각은 받아들이고 느낍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수(受)는 정신적 작용을 통해 생각하고 인식(想)하여 지식으로 만들어 저장합니다. 
거기에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들 좋음, 나쁨, 싫음 등 심리현상들(行)을 통해 알음알이(識)의 경험적 지식이 됩니다.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을 오온(五蘊 = 色․受․想․行․識)이라 하고 이것의 적집(積集)’이 곧 "나(我)"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그것을 가르친 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위대한 지혜라는 뜻입니다.
현상계의 세게에서 피안의 세게로 가는 커다란(오묘한) 지혜를 일컫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마하 = 위대하다', '반야(Praiñā) = 지혜', '바라(Pāra)는 피안, 밀다(mitā) = 건너가다' '도달한'의 과거형의 뜻이다.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인데,  
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한’이라 해석하고, ‘다’를 상태라고 해서 피안에 도달한 상태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오온(五蘊)'은 다섯 가지 무더기를 의미한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은 인간 곧 내가 가진 
“나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나"라고 할만한 <주체> 혹은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석가모니의 "깨우침"을 가르친 반야심경에서 나는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여기서 한자 무(無)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무아(無我)= 내가 아닌 나>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입니다.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범어(梵語, 산스크리스트어)로는 아나트만(Anātman)입니다. 
 

인도 종교(힌두교 종파)와 철학(불교)의 뿌리, 베다

인도철학을 논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들부터 이해하자.
 1) '산스크리트', संस्कृतम्(saṃskṛtam), '정교한, 잘 정돈된'이라는 뜻 베다를 기록한 문자
      = 한자로 범어(梵語)라고 번역하여 사용함.
 2) 리그베다 : 기원전 1000년경  전후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10권 1028의 시구(詩句)로 되어 있다.
    주로 자연신 숭배의 찬미가를 중심으로 혼인·장례·인생에 관한 노래들
    천지 창조의 철학 시(哲學詩), 십왕전쟁(十王戰爭)의 노래 등을 포함
 3) 브라흐만은 원래 《리그베다》에서 찬미가 또는 제사(祭詞)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브라만 계급에 의해 제사 만능 시대가 되자 거기에 간직된 신비한 힘으로 간주되었다
 4)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해설집(브라흐마나(Brahmana))에서 출발, 수백 년간 많은 철학자들이 남긴 어록과 같은 것
     우파니샤드는 베다 전통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형성되었고, 베다 사상의 결정체.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수많은 해설서들 중 하나로, 베다의 끝인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끝 = 베단타'라고도 불린다.
 

      슈웨타슈와따라 우파니샤드 제1장 1절

   "브라흐만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과연 브라흐만은 세상의 근원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누구로 인해 우리는 살아 있는가.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 설 것인가.
    브라흐만을 아는 자들이여!
    누구에게 영감을 받고
    우리가 이 모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지 말해 보세."
 
 인도사상에서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 : "힘"이란 뜻으로, 영원불변의 원리이며,
 우주만물의 궁극적인 원리이자 궁극적 실제로 모든 만물 안에 있다고 봄)
<개체적 자아인 아뜨만>(Ātman : 숨, 호흡, 절대 변하지 않는 초월적인 자아)이 동일하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범=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의 배후에 혹은 그들(我= 아뜨만) 안에 내재해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브라흐만은 우주에 있는 아뜨만이고, 아뜨만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브라흐만이다.”라고 합니다.
이 같은 사상은 인도의 지배민족이었던 아리안족(브라만)에 의해 전파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브라만(브라흐만) 계급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는 인도 사상의 원천인 우파니샤드의 중심내용이 되었습니다. ,
이는 후대의 아드바이타 베단타 · 비슈누파 · 시바파 · 샤크티파 등 인도의 힌두 철학과 종교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에도 초기에도 나타납니다.
 

불교철학의 시작 

무아(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 <깨달음의 시작>이다.
무아는 즉, 만물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오온으로 둘러싸인 ‘나’는 '참 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벗어나야 할 대상이다.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나’를 구성하는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의 5가지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이 ‘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들 모두가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다섯 요인>을 우리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부터 오거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충동들과

생각들 따위에 우왕좌왕하고 일희일비하며 시간을 탕진하며 살아갑니다.
분노가 일었을 때엔 분노와 하나가 되고,  탐욕이 일었을 때엔 탐욕 자체와 하나가 된다.
또한 스스로의 생각(이미지)을 생명처럼 간주합니다.

그래서 그것의 손상에서 오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곤 합니다.

이같이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는 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따라서 내가 현상계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한 상태에서 문제나 상황을 직시해 보면
즉, 더 이상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 : 현상)를 바라봄으로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곧 자아를 내려놓고 문제의 현상을 바라보면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마주하는 경험적 현실, 즉 <오온 :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이라는
족쇄로부터 벗어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세상과 나는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거기에서 고정된 존재로서 <‘나’ 혹은 ‘나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무아의 가르침은 더 이상 현실에만 묶여 있는 ‘나’, ‘나의 것’, ‘나의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사람이 육신에  속한 나(오온이라는 족쇄에 붙잡혀 있는 한)는 이 세상에서 끝없는 갈등과 번민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들은 오온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불안과 공포,
생리적 욕구와 감각적 쾌락 따위에 파묻히기도 하고,
그러한 것들에 끌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신을 차리고 <오온>의 하나하나가 과연 참으로 ‘나의 것’ 혹은 ‘나의 자아’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자로 쓰인 반야심경은 산스크리스트어(범어)를 한자로 음차하여 발음한 것으로,

그러므로 한자로 해석하면 전혀 맞지 않는다. 단지 음차일 뿐입니다.
(우리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범어) gate gate paaragate paarasam*gate bodhi svaahaa.
          iti prajn$aapaaramitaa-hr*dayam* samaaptam.
(영어) Gone, gone, gone beyond, gone altogether beyond,

         O what an awakening, all-hail !
       -- This completes the Heart of perfect Wisdom.
(원어를 한글로)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번역 1>. 간 이여, 간 이여, 넘어간 이여, 함께 (저 언덕으로) 넘어간 이여!
<번역 2>. 가세, 가세, 건너가세. 함께 건너가 깨달음을 얻으세.
             "오 깨달음이여! 그대로 두어라! 스바하!"
             이처럼 반야바라밀다의 핵심이 끝났다.
<번역 3>. 감이여! 감이여! 저 언덕으로 감이여! 저 언덕으로 완전히 감이여! 깨달음을 위하여 스와하!
<번역 4>. '가버리게 하네! 저 허무의 세계로 함께 가버리게 하네!"
<번역 5>. 가자 가자 오서 가자. 저 허무의 세계로, 무한한 깨달음의 세계로,
<번역 6>. "건너갔다. 건너 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소서.
            진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번역 7>. (건너) 갈 수 있는 자여, 갈 수 있는 자여, 피안에 갈 수 있는 자여,

              피안에 완전히 갈 수 있는 자여, 깨달음이여, 행복 있으라.
      iti Prajñāpāramitāhṛdayaṃ samāptam.
      여기 지혜 완성의 마음이 끝났다.

불교철학은 이 세상에서 변화하는 현상계에 육신이 반응하고 느끼는 대로 따라가지 말라.
 그것은 진실된 나 자신이 아니다.
 진실된 나는 육신에 속한 오온이 깨지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은 자"가 되어   
 그래서 참자아로 살아가야 한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 곧 인생을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나그네"라고 말한다(베드로전서1:1).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

그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도록 깨우침과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주의 은총이 없는 인생은 가련하고 허무할 뿐이다. 
그러니 오셔서 은총을 내려 주시고 
이 땅에서 수고한 대로 보상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철저한 유일신관으로 그를 주로 모시고, 그의 자비로운 손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한다. 
여기에 예수님은 "그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친다.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로 인하여 살고 
아버지 안에서 살고
아버지 도움으로 사는 것을 고백한다. 
그의 통치 안에서, 그의 사랑 안에서, 그의 도움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직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본질을 아시기에
그는 우리 인생을 아시며, 또 우리 속사람을 아시며
친이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며,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에게 이 진리를 찾도록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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