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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저주하시는가?

[明泉] 맑은 샘물 2023. 7. 9. 15:13


신명기 21:23 그 시체(屍體)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當日)에 장사(葬事)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基業)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者)는 하나님께 저주(詛呪)를 받았음이니라

법이라는 글자는 원래 '삼수 변 ( 氵)' 과 '해태 치 ( 廌 )', '물리칠 거 ( 去 )'가 합해진 글자라 한다. 해태(獬豸/獬廌)는 동아시아 고대 전설에 따르면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해치라고도 하는데, 재앙을 막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글자를 보아하니, 세상의 이치는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게 법이지 아니한가[ 法 = 氵+ 去(갈 거)], 순리에 맞아야 올바른 법이다.

'저주(詛呪)'라는 낱말은 누구나 기피하고 생각에 떠올리기조차 꺼리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저주는 대부분 원한이나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한 탐욕일 뿐이며, 또한 그 효과가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공정하지도 않으며, 공의로운 처사(處事)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저주의 시행자가 하나님이라면 그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지요.
그것은 모든 복의 시행자시요, 가장 공정하고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자는 詛(
저주할 저. '저주하다', '맹세하다)인데, '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주(詛呪/咀呪하다)는 + (또 차), 咀 = 口 + 且가 합쳐진 형성자인데, 일정한 형식을 갖춘 것을 주문(呪文)이라 한다.

1. 하나님의 저주 : 공의와 법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들의 저주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인간들의 저주는 사사로움 즉 자기 자신도 불의하고,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들의 복수심과 질투심, 그리고 과장된 미움,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사롭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저주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성경이 저주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저주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행》입니다.
즉, 하나님이 규정하신 법에 근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때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저주라고 법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과 그가 명령하신 법을 인간 스스로가 떠나는 것 자체가 저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저주가 영구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구한 것이 되지만, 만일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그 저주와는 상관없게 되고 작별하게 됩니다.  
돌이키는 자 곧 회개하는 자는 저주에서 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이처럼 저주는 영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총체적인 저주,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저주 속에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저주"

구약성경에서 "저주"라는 뜻으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총 5가지가 있습니다.
"아라르, 켈랄라, 알라, 하람, 카바드" 등입니다. 그런데 알라, 하람, 카바드 3가지는 그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아라르"와 "켈랄라"라는 단어가 그 의미와 분야에 있어서 상당히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라르"와 "켈랄라"

이 두 단어는 어떤 의미이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1) "아라르"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선포(선언)적인 의미로서의 저주로서 사용되었는데, 맨 처음 등장하는 "저주"(창 3:14)는 뱀에게 하신 것이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아라르)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는 저주하지 않으시고 땅에 저주를 하셨을까? 땅이 대신 저주를 받고 그 고통을 인간이 겪으면서 회개하기를 원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후로 인간도 저주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노아의 저주는 무엇인가? 노아가 술에 취했을 그때는 아직 가나안이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왜 노아는 태어 나지도 않은 가나안을 저주한다(?). 가나안은 훗날 함이 낳은 자식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노아가 정말로 함을 저주하였을까? 함이 악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저주의 원인을 제공한 노아는 잘못이 없는가?
여기서 저주는 땅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도 아담을 직접적으로 저주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창 9:25에서도 "가나안은 저주(아라르)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나아가 점쟁이인 발람이 주술적으로 저주를 사용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할 권한이 없다. 또 그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아라르)하라(민 22:6)."

그러나 "켈랄라"라는 저주받은 상태 곧 저주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형벌이나 불행 그리고 재앙으로서의 저주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히브리어 "베라카(복)"이라는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야곱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베라카)은 고사하고 저주(켈랄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 27:12)"
하나님께서도 모세에게 "내가 오늘 복(베라카)과 저주(켈랄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 11:26)"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켈랄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신 28:15).

아라르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저주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지 말라는 경고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라르)를 받을 것이라"(신 27:26).
갈 3:13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다는 것을 이제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3을 보십시오.
"다시는(더 이상) 저주가 없으며"
이 말씀은 저주가 끝났다. 완전히 결별했다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란 무엇인가?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저주는 불순종의 결과이다
둘째로, 저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부재이다.
셋째로, 저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힘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영국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의 패트릭 마빌로그(Patrick Mabilog)는  "성경은 저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What does the Bible tell us about curses)"라는 칼럼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정리해 주었습니다.

1. 저주는 불순종의 결과이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에 대한 징벌로서 저주를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규정해 놓으신 저주 속으로 스스로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주가 무엇인지 이미 알려 주셨고, 거기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저주받는 것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범죄로 인한 결과요 우리 잘못 때문에 받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주는 인간에게 다양한 고통들이 찾아오는데, 질병과 질환, 무기력, 중독, 죽음 등입니다."
마빌로그는 "인간이 받는 저주는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며 사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면서 잠언서 3장 33절을 인용해 말합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잠 3:33)

2. 저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부재이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우리는 사랑의 반대말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미움, 저주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 없음, 사랑의 부재입니다.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음, 옳음입니다. 그런데 저주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선하심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3. 저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저주는 영구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라도 저주 아래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와 같이 저주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법함을 제거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즉, 율법을 어김으로 가져오는 형벌과 고통들을 대신하셨습니다.
시 66: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우리에게서 거두시는 것이 진짜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에 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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