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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道)와 성경의 도(道)

[明泉] 맑은 샘물 2022. 11. 30. 23:09

『노자』 혹은 『노자도덕경』이라고 하는데, 약 5,000글자  81장으로 되어 있다.

상편 37장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이같이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으로 이루어 있다.
상권 도경의 제1장은 노자의 도(道)사상을 총괄적으로 언급하며 설명한다.

노자는 도(道)를 철학적 관점 곧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1

 

[해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 地之始 有名萬 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천 지지시 무명만 물지모)

■  첫구절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만일 본래의 <도(道)>를 인간이 사용하는 말(언어)로 이름을 붙이면,

본래의 <도>는 축소 혹은 변형 또는 약화되므로

본래의 <도(道)>가 아니다.

본래의 도를 가리키려고 이름을 도라고 붙였을 때(명명),

그 붙여진 도가 본래의 도와 항상 같은 것이 아니다."

만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도()라면 그 도는 본래의 도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말)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이며 근원인데,  어찌 <도>라는 글자 하나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붙여진 그 이름은 <영원한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도)은 존재하지만,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우리는 그것을 '도'라고 명명한다. 다른 표현이 없어서)

그것은 우주(하늘과 땅)의 기원이다.

그것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자(어머니/양육자)이다.

 영원한 그것 피조세게에서는 "도"라고 명명할 뿐이다. 

  * 영원 속에서 볼 때  그것(도) 아직 피조물이 없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 그러나 그것이 피조 세계를 낳았고, 그것에 의해 피조 세계가 존재하므로

    피조세계에서 볼 때  그것은 만물을 존재케 하는 어머니(양육자)이다.

 

 도(道)의 실체

말할 수 있는 도(道)는 늘 그러한 도(道)가 아니라.

도(道)는 모든 것의 근본(根本)이요,

원리(原理)요,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도(道)는 실체(實體)이다.

 

 도(道)는 설명이 어렵다
분명 도는 존재하는데, 그 도를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이 ‘도(道)’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이 도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도라고 말한 글자(유명)가 도 자체를 담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로 "도(道)"를 말하는 순간 그 "도(道)"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본질의 도(道)는 언어로 설명하거나 명명하기에 너무 광대함 때문이요,

언어는 제한적이고 축소적이기 때문이다.

어찌 형이하학의 언어로 형이상학을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道)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본래의 도(道)는 우주보다 크다.

도(道)는 우주의 근원이며 시작이다. 또 우주는 도(道) 안에 있다.
노자는 이처럼 본질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질인 도(道)를 터득하고,

그 도(道)를 따르는 사람이 덕(德)의 사람이다.
- 노자의 도경 전체를 보아도 도(道)가 인격적 실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즉, 비인격적인 어떤 실체인데, 만물의 기원이다.

도는 존재하는 그 어떤 실체이고, 인간이 그 도(道)를 따를 때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이는가?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 때문이다.

그것을 버리면(내려놓으면) 우주의 감추어진 진리가 보인다.

 

故常無欲 而觀其妙 常有欲 而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그러므로 늘 욕심에서 벗어나 있는 자만이 오묘함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자는 숨겨진(감추인) 본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 '()'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이 두 가지(묘/속와 요/겉)는 같은 '근원'에서 나오지만 이름이 다르다. 

본질의 '근원'이 나오는 곳을 '()'이라 한다

그윽하고 놀라운 <현> 모든 신비함(묘)들이 나오는 문이다.

 

성경의 도(道)에 대해

• 중국어 성경 요한복음 첫 구절은 '太初有道.'(태초에 도가 있다' 혹은 '태초에 도가 있었다').
• 우리말 성경은  초기에 ‘태초에 도(道)가 계시니라’고 했고,

지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노자 사사상에서는 우주의 실체, 근원인 도(道)는 비인격적 실체이다.

또 태초부터 존재하는 존재이다.

만물의 근원이다.

만일 노자가 도를 만났다면 인격체로 기록했겠지만,

그가 깨달은 사상의 세계에서는 도는 인격적 존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철학적 추론으로 얻은 실체이므로 그 도의 본질의 외면을 깨달은 것이다.
▪︎ 도가 비인격체(그렇게 깨달으면)이면 '있다'로 번역하고,

  그가 도의 본질인 인격적 실체를 경험적으로 알았다면 '~계시니라'로 설명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1: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2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자신이 경험한 도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요한일서 1:1 "태초(太初)부터 있는 생명(生命)의 말씀에 관(關)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注目)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

2 이 생명(生命)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證據)하여 너희에게 전(傳)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者)니라."
요한은 "태초"는 도(道)의 존재를 설명한다.

태초는 물질적 시간이 만들어지기 이전 곧 영원이다.

시간적 의미보다 도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바울의 서신을 번역할 때는 도(道)라고 번역을 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十字架)의 도(道)가 멸망(滅亡)하는 자(者)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救援)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이라.

 말씀=도(道)=말씀(신격적 실체)
신약성경 [히브리서 11:3하]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世界)가 하나님의 말씀(道)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KJV]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NASB]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
이처럼 우리 성경 번역 초창기에는 요한복음 1:1을 "태초에 도(道)가 계시니라"라고 했었다.
번역본을 바꾸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번역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번역했다.

 

도(道)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체이다.

다 설명될 수 없는, 그러나 <계시>로서 알게 되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요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그 영원하신 도(道)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도(道)가 되셨다.

그 도(道)는 진리이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한 존재>이며,

도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며,  

그가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하늘과 땅의 중보자요,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이며, 안내자, 길(道)이 된다.
요14:6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이 바로 그 도(道)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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