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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의 싸움, 성화(거룩함)의 길에서

[明泉] 맑은 샘물 2023. 6. 1. 00: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3)
은혜에 의한 성화, 성화의 은혜

거룩하여지는 성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는 은혜로 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성화는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령에 의한 성화

구원의 선물이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를 우리의 것이로 삼아주시고 믿어지게 하심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로써 더 이상 무엇을 덧붙이거나 보태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완성은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져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말씀, 영생의 씨"가 그 사람의 심령에 심깁니다.
그 진리와 생명의 씨는 하나님을 닮게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진리와 생명은 우리로 양심을 깨끗해지도록 성장시키며, 거룩을 열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거짓말을 싫어하고 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가 양심을 주장하기에 자신이 거짓에 속하는 것을 양심이 못 견딥니다.
이처럼 진리의 영, 성령이 오시면 정직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진리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로 거룩함을 입어 아버지 앞에 구김없이 서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영혼,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며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고, 동행하시며 거룩하여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온전을 향하여

신자는 이 땅에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을 향해 나아갑니다.
천국가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는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도 경험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주님과 진리와 동행하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가르치십니다.

경향성

거듭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 속에 살기를 원하는 경향성이 생겨납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죄의 경향성인 원죄가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것처럼, 성령은 우리 안에 새로운 경향성을 갖게 하십니다. 생명 곧 예수로 충만해 지도록 하십니다.
그는 말씀을 만나고 깨닫습니다.
죄를 분별하고 그 경향성과 싸우며, 죄를 혐오하며, 점점 죄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성화의 구원(redemption of sanc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은 시작과 성장과 성숙과 완성을 향해 자라 갑니다. 성화는 성장, 성숙,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일평생,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루어지는 긴 과정입니다.
은혜에 의한 성화는 새로 태어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이 닮아가는 과정이며, 죄로부터 멀어지고 여호와께 성결로서 거룩해져 가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돌봄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한 자녀들을 교회에로 부르시기를 기뻐하시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유아와 어린이로 있는 동안 교회의 어머니다운 돌봄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몰라서 혹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3)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 신자 아닌가?
신학자요, 선교사요, 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기록한 그는 누구에게 명함을 내밀수 있는 것들, 화려한 커리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울 된 것이 바울 자신 때문입니까?
아무것도 바울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된 것, 선교의 열정을 가진 것,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일 모두가 주님이 붙잡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그같이 자신이 성숙했어도 아직도 자신 안에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한다면 바울은 분명 뛰어나고 우월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서면 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은혜에 붙들리지 아니하면, 멈추고 말 팽이였습니다.
스스로 돌 수 있는 에너지가 없지요.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채찍만이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이며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성을 완전히 제가하시지 않으시고 남겨 두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과 필요성을 늘 각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분배받고, 그 땅에 산다고 거룩한 자녀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 안에 있는 두 가지 경향성

신자 안에 "은밀한 대적"도 원주민처럼 남아 있고, 신자 안에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도 함께 거하여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깁니다.
마음은 죄와 은혜가 지배하려고 싸우는 전쟁터입니다. 매일매일 순종으로 죄를 이깁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합니다. 마귀는 겸손 앞에는 무릎을 꿇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새로운 영적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면 그의 구원은 불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라고 칭하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녀들은 불구덩이에서 막 건져 낸 것과 같습니다.
불에 그을리고 검게 타나 남은 검댕이를 제거해야 합니다.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은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영적 긴장이 있습니다.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곧 존재론적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의 습관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죽이고 제거하는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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