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혼의 싫증이 찾아 오는가?
복 속에서 복을 모른다(?)
옛 속담에 "복 속에서 복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즉, 너무 행복에 겨운 나머지 그 속에 취하게 되면 현재 주어진 행복을 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에 겨워지면 그것이 복임을 잊어 버린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즐거워하고 그것만을 바라는 경향성이다. 그런데, 그 사랑에도 싫증이 찾아오는가? 이것은 인간이 가진 감정의 하나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 좋아하는 음식도 포만감이 넘치면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싫어하게 된다.
바로 싫증이 그렇다.
처음에는 너무나 좋고 행복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을 배반하게 된다. 배부르게 되면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모른 척한다. 이는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라는 말이다. 정말 가난하고 어려울 때 함께 해 주고, 고생이 같이한 아내를 일컫는다.
싫증의 유시한 다른 말로 염증(厭症)을 사용하는데, 이 것도 싫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무언가 귀하게, 친근하고, 좋아하고, 흥미롭게 여기던 것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 싫어할 염(厭). '싫어하다', '물리다' = 굴 바위 엄厂 [기슭엄/굴바위엄/언덕 한] 자와 "물리다는 뜻의 염(猒)"은 달다는 뜻의 감(甘)과 개고기 연(肰)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염(厭) = 厂(굴 바위 엄)+달감(甘)+개고기 연(肰)
몸에 좋은 개고기가 배가 고플 때 달게 여겨진다. 그러나 먹고 또 먹고 계속해서 먹으니 포만감을 느끼며 더 이상 먹을 수 없도록 굴 바위처럼 배를 누른다. 그래서 싫어하게 되다는 의미가 되었다.
영혼의 싫증이란?
왜 싫증(get bored, pall on, cringe)을 느끼게 되는가? 싫증은 더 이상 반갑지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평소에 좋아하고 흥미를 갖던 것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것과 같이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나 느낌을 말한다.
왜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가?
싫증은 권태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권태감은 이전의 친밀감이 사라지고, 교제도 뜸해지고, 사랑이 식어져 가까이하는 것을 괜히 부담스러워하는 상태이다.
권태(倦怠)는 삶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에서 시작된다. 그 게으름은 나아가 싫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권태, 게으름, 싫증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로 찾아온다.
영혼에 찾아온 싫증은 하나님에 대한 싫증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영혼에 찾아온 싫증의 원인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영적 무기력증에서 시작된다.
무기력증의 원인은 무언가를 하고자 원하지만 체력의 고갈, 삶의 목표에 대한 부담, 생각이 무언가에 압박을 느끼며 짓눌릴 때이다.
이러한 무기력은 순간 정신줄을 놓게 만들고 게으름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면 싫증으로 발전한다.
싫증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부패성과 불완전함 때문이다.
부패성(腐敗性)이란 부패하는 성질. 고인 물이 부패하듯 바르지 못하고 타락함을 일컫는다. 정치나 사상, 올바른 의식 따위가 본질에서 벗어나 타락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모든 인간의 부패성을 가진 존재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성경이 진술하는 의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에 그러하다는 말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보시고 판단하실 때에 세상에 의인이라고 인정받을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와 "완전 부패"(utter depravity)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간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의지이다.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인간은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자유의지,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는 책임이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즉, 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타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러면 이같이 부패성(부패하는 속성)으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였다면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인가? 아니면 "완전 부패"(utter depravity)인가?
‘전적 부패’란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이 ‘전면적(全面的) 부패’ 한 것을 말한다.
본래 창조하신 사람의 "지성, 감성, 의지" 등 모든 방면에 부패함을 의미한다. 어느 부분도 창조 때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의로운 모습>을 100퍼센트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람의 부패가 어느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어느 부분도 그 치명적인 질병에 저촉되지 않은 채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라고 진술하는데, 인간의 ‘전적 부패’, 혹은 ‘전면적 부패’의 상태를 일컫는다.
회복 가능성
전적부패는 전면적으로 여러 부분(지정의)에서 본래 가지고 있었던 기능이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분적으로 나마 남아 있있다.
아직은 회복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전적부패는 자기의 노력으로는 불가하지만, 하나님의 개입하실 때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마치 나무가 베임을 당했어도 그 밑둥인 그루터기를 남겨두심같이 타락하던 와중에도 남겨 두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를 들면, <전적 부패>는 적의 공격으로 모든 부대가 잔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지만, 아직 남아 있어 외부의 힘의 도움을 받으면 회복할 수 있음.
<완전부패> : 적의 공격으로 완전히 100% 파괴되어 생존자가 0%이어서 외부의 도움도 의미가 없음
‘완전 부패’는 회복 가능성이 0%이다.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천사의 타락은 완전부패이다.
사탄의 상태가 바로 그러하다.
회복불능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원흉인 마귀-사탄은 <완전부패>하여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로 절대 개입하시지 않으시며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 넣으신다.
하지만, 그 마귀-사탄으로 인하여 유혹을 받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전적부패이기 때문이다.
비록 천사가 제 아무리 탁월한 영적 존재이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는 아니했다.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인간은 천사와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차원의 존재이다.
그러한 인격성을 가진 인간에게 죄가 유혹을 통해 들어온다. 바로 모든 원수요, 원흉인 타락한 천사는 회생불가능한 상태에로 타락하여 <사탄, 옛뱀, 마귀>가 된 것이다.
인간의 (소극적) 타락은 천사의 (적극적) 타락과는 질적으로나 다르다.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의 자리를 직접 차지하려고 탐내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권좌에 앉는 것이었다.
천사가 타락한 것은 싫증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는 싫증이었다.
그 싫증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aversion)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탄이 가졌던 하나님의 보좌를 탐한 것이 아니다. 그 반감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이었고, 그것은 사탄처럼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적대(opposition)가 아니었다.
그 싫증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다. 그 반감은 단지 아버지의 속박,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하던 아버지는 그가 돌아 오기를 기다린다.
탕자의 일탈은 야반도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일탈 : 죄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귀-사탄이 가졌던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나 적대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크고 적극적인 공격이었다.
이에 비해 인간이 가지는 반감과 적대감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님의 간섭없이 하나님처럼(자유로운 존재) 되어보고 싶은 욕망이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부패성과 불완전함 때문
인간애게 있는 부패성과 불완전함은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길 만한 능력은 없었다.
사탄에게 속아 꾐 받은 인간은 연약한 존재였다.
그러하기에 마귀는 그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마귀는 간교한 지혜로 하와에게 접근하여 순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하와는 순긴적으로 생각의 혼란과 판단의 기능이 마비되어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확신이 무너지자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인간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
오직 그 유혹을 이기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세주 예수 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에게 접붙 여지고, 그에게 매여있지 않은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품에 안기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돌봄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유
인간이 소극적으로 하나님과 대적하는 반항은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죄를 가리우시고 덮어주신다.
시편 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사도바울은 다윗의 고백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롬 4장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David say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