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사건과 주관적 적용
역사(歷史, history)라고 말할 때 사람마다 다양한 뜻으로 사용한다 [사기(史記), 사료(史料)]. 그러나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어떤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 역사란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 또 ‘그 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기록된 과거’를 말한다.
이처럼 역사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그것을 서술하여 남긴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가 있다.
전자를 사실로서의 역사를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고 하며, 후자를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들을 지칭한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겠는가.
이러한 사건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가 없다면 그 사건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에 의해 객관적 조사와 연구로 재조명되어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역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는 자신의 역사관, 개인적인의 가치관과 주관적 세계관의 요소가 불가피하게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이며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장은 주된 내용은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낭패를 당했을 때 물로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과 유월절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을 예수의 사역의 서두에 둔 것은 사도 요한의 의도가 있다. 즉, 예수는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처음으로 행하신 잔치집에서의 포도주 사건은 그가 말씀하신 대로 성취되는 표적 곧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3장에서 니고데모가 찾아와 했던 말속에 숨겨 두었다.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1)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2)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사건과 해석
이처럼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잔치와 유월절에 예배하러 온 자들이 제물로 쓰일 짐승과 성제에서 환전하여 헌금하는 행위를 보시며 소란을 피우시며 무언가를 <시위(示威) :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물리적인 행동> 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소란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누가 감히 성전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선지자이다. 참된 예배 제사가 아닌 그 배후에는 매우 음흉한 자들의 계획이 숨겨져 있었다. 백성들도 알고 있지만, 대놓고 시위할 수는 없었다. 성전시위대가 그들을 체포하여 구금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야 할 무언가를 시위한 것이라면 그 사건은 의미가 다르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은 예수의 시위와 행동을 해석해 주고 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만이라면 기적이 있었던 사건으로 끝이다. 더 이상 설명이나 해석도 필요 없다. 하지만, 그 행위를 하신 분은 누구인가에 따라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야 그 사전의 진장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
우리는 사건에 대해 완벽하게 기록하여 남길 수는 없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역사에서 모든 것을 전부 완벽하게 기록할 수가 없다. 기록하는 저자인 역사가의 견해와 식견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누락되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제외되기도 한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사건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통 역사서>와 <검증되지 아니한 비정통 역사서가 있다.
성경을 정경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이라고 부를 때 정경(正經, canon)을 의미한다.
이는 위서(僞書 : 신뢰할 수 없는 역사서)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은 기독교에서 신앙의 규범이 되는 내용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다. 가경이나 위경들은 성경적 권위가 없는 내용들이지만, 역사적인 부분에서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상황을 이해하는데 일부분 도움이 되기도 한다.
정경이라고 부르는 캐논은 그리스어(헬라어) κανων(카논) 및 라틴어 canon을 번역한 것이다. κανων의 뜻은 <곧은 막대기, 자> 등을 의미하나, 상징적으로 <규범>을 의미하기도 했다.
약속(언약)과 믿음
이제 주관적 적용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 역사는 사건이 주는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 역사처럼 교훈도 있고, 또 약속 곧 언약으로 채워져 있다. 언약을 제외하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의 계시들을 제외하고 읽어도 탁월한 문학으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의 역사를 기록한 전기집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와 약속하신 것이기에 중요하다.
그 약속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후손과 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주관적 적용(나에게 적용)
여기서 우리는 <언약 때문에> 믿음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주시는 유효한 약속으로 주관적인 적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언약하신 분과 그 언약의 내용이 우리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창 17장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8장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