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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와 사랑의 만남

[明泉] 맑은 샘물 2023. 4. 15. 10:08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들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인간과 비교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간에게도 있지만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인간(사람)은 육과 영의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며 인격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도덕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공유하지 않는 비공유적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지존하시며, 인간이나 천사가 가지지 못한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은 우열이 없다.

하나님만 홀로 가지신 속성인 [성,의,진,선,애](거룩, 의로움, 진실하심, 선하심, 사랑) 모두 동등하다.

모두 중요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속성들 동등하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언제나 동등하게 나타나고 실행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사랑과 공의가 동등하지 못하다.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고, 어느 것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
‘공의(justice, 公義)’ 는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이며 심판을 보여준다.

우리는 공정한 재판을 바라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길 원한다.
우리는 '공의'와 '율법'이라는 단어가 갖는 딱딱함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를 떠올린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공의’의 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알게 해 준다.

<하나님의 공의> 안에는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공의>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사랑’의 발로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뗄 수 없고, 나뉠 수도 없다.

사랑은 공의로 나타나고, 공의는 사랑의 완성이다.

공의 속에 사랑이 있고, 사랑 속에 공의가 있다.

복음 곧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공의와 사랑이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이다.
십자가를 볼 때 그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공의인가? 사랑인가?"
아직 범죄하지 않은 무죄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법을 제정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나님의 법을 고지해 준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직결된다.

만일 인간이 범죄(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면 창조의 목적은 무너진다.

창조세계는 파괴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세계의 보존과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곧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셔야만 했다.

그것이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금지하신 것이다.

 

자유의지의 선물과 그것을 통제하는 법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그 판단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기준만 바로 지킨다면 창조 세계 안에서 무한히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영생을 누림이다.
하나님의 공의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지복(至福, 그 위에 더함이 없는 행복)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공의로 나타내셨다.

그들이 하나님 법(공의)에 순종하여 복 받기를 바라는 하나님으로선 마땅히 취하여야 할,

그렇게 해 주셔야 할 당연한 일이었다.

자유의지를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으로 영생을 주신다.

그것이 피조물의 아름다움이다.
공의가 딱딱하거나 사랑 없음같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죄성 때문이다.

또 공의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때문이다.

공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각진 삼각형을,

사랑이라고 하면 동그라미를 떠올린다.
만일 사랑이 무조건적인 용납과 한없는 부드러움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질서이다.

사랑의 결핍은 질서가 깨짐이다.

질서를 회복하려면 공의를 세워야 한다.

사랑은 사랑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용이 있다.

절제가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도 사랑으로 시작하여 절제를 완성된다.
‘사랑’에 ‘공의’가 결여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愛)’이 아닌 ‘해악(害惡)’이 되고 만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
우리는 '사랑의 징계'라는 말을 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직 기준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에 대해 올바른 ‘징계’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며,

더 이상 악에 치우치지 않게 해 주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을 안다면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느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마 죄를 방관하거나 바라 보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난 곳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현된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단다.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살리려 하심’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크나 큰  ‘사랑’이 아닌가.

그러나 죗값은 치우어져야만 한다.

아들을 보내심은 "하나님이 공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는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그가 담당하게 하신 것은 ‘그의 공의(公義)’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먼저 율법을 주신 것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를 율법 아래 가두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긍휼,

넘치는 사랑이 아니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의 행하는 것 모두가 죄 투성이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정죄한다.
그 누구도 행위로써 율법이 정한 저주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그래서 또 다른 의, 곧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 해 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보석금을 내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당신을 보석금으로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자유케 되고,

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나타내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로우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내어주시고,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는 정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얻었다.

우리의 공로는 전혀 없다.

우리의 구원 곧 죄에서 해방되고,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일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를 자랑할 것이 없다. 

또한 행위로 구원받을 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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