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은 무엇인가?
마가복음14장 8절~9절,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8, 개역한글)
“ὃ ⸀ἔσχεν ἐποίησεν, προέλαβεν μυρίσαι ⸂τὸ σῶμά μου⸃ εἰς τὸν ἐνταφιασμόν.” (막 14:8)
“She has done what she could(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She has anointed my body beforehand for the burying.”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는 주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에 대하여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우리 말 성경은 "그(녀)는 힘을 다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힘을 다하였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코"(가지다 소유하다, 보유하다, 점유하다) 와 "포이에오"(만들다. 행하다, 창조하다)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여인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지고 창조의 행위를 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을까요?
이 여인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고귀한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여자로서, 특별한 일 곧 생산적인 일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까요?
이러한 행위는 <왕, 제사장, 선지자>로 임직하는 자
에게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제자들처럼 나무라거나(책망, 꾸지람) 말리지 안았습니다.
도리어 칭찬하셨습니다.
그만한 가치 혹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향유의 값이 약 삼백 '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일꾼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일꾼의 거의 일년 치 임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그 여자는 여러 해 동안 생활을 줄이고 소비를 아껴서 열심히 모았을 것이다.
이 비싼 향유를 그 여자는 기쁘게, 자진해서 주님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아낌없이 모두 다 부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 여자의 무조건적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육신을 입도 계신 성자 하나님이 하신 칭찬입니다.
이방인으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고,
가나안 여인 곧 두로 지방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행동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도 회계를 맡은 유다를 비롯하여 계산에 익숙한 약삭빠른 사람들입니다.
이 여자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내며 너무나 귀한 것을 일시에 낭비했다는 불평합니다.
어찌보면 그들의 생각은 매우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 비싼 향유를 그렇게 낭비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처럼 <만사>를 계산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의 말이 전적으로 옳게 여겨집니다.
오늘날처럼 매사를 돈으로 계산하고 사람을 오직 <돈의 가치>로만 보는 사람들의 눈에 이런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종종 예수를 믿는 우리들 조차도 머리로는 이 여인의 행동 곧 순전한 나드를 단번에 다 붓는 허비하는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투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계산법이 아닙니다.
하늘의 계산법,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나무라고 꾸짖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여자의 행동을 거절하거나 말리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말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의 행동을 전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더 정확히 번역하면,
"이 여자는 나에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는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나의 장례(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내 몸에 미리 향유를 부었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로서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례한 시신에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눅23장 55절,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절,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육적 가족으로 살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통해 조상들의 가족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일이다. 그렇개 새로운 가족으로 돌아가는 그를 위해 최고의 존경과 예우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 본래의 모습 곧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수 차례 예고하셨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자들의 머리에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얻게 될 이익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게 된 것일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육신으로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에게 할 수 있는 헌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다른 방법으로 헌신하면 안되나요?
향유를 붓는 것은 "자기에게 찾아 온 손님을 가장 극진히 대접하는 섬김"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말씀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여인 알았기에 지금이 헌실할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고, 주저함 없이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계산을 초월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의 아름다움은 두 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까지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단번에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낌없는 사랑으로 보여준 '진정 아름다운 헌신'이었습니다.
헌신은 언제 하게되는지요?
첫번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을 찾아와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사랑을 측량할 수 없기에,
주님께 받은 사랑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사랑을 비교하거나 따지거나 인간적인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주님이 날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
그리고 받은 은혜와 사랑을 주님께 헌신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오늘날에도 이런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주위에 수없이 많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도 교회에 헌금하는 것보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일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는 선행은 자칫하면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몰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개인적인 선행도 때로는 은근한 교만의 표현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보답을 바라는 은근한 계산적인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더욱이 진정한 헌신은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선행도 자기 혼자서 하기보다는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귀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옵니다.
바로 그럴 때에만 이웃 사랑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헌신이 없는 이웃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오직 구원에 대한 진지한 감격과 감사로부터 나옵니다.
베다니의 여인이 그처럼 뜨겁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을 통해 용서와 구원을 받았고,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예수님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예수님에게 바치겠다는 심정으로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가장 아끼는 것을 예수님에게 드릴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적인 계산과 남의 비방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실 수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헌신을 망설이게 합니까?
여러분에게는 그 여자처럼 값비싼 것이 없다고 망설이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재물보다 더 귀한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시간보다 더 귀한 몸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여러분의 영혼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베다니의 여인처럼 거룩한 낭비, 아니 아름다운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가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옮기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을 언제든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너희는 항상 나를 위해 헌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다니의 여인처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기회는 늘 돌아오지만, 예수님에게 헌신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올 때마다 이 여인처럼 거룩한 허비, 아니 거룩하고 아름다운 헌신을 하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과 부활을 예비하였던 그 여자처럼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헌신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섬김과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당장은 그 헌신의 마음이 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헌신하고 싶어도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성령이 주시지 않으면 참된 헌신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역구에서 억지나 부득이함으로 겉으로 보여지는 헌신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기억하실 필요가 없는 기억도 하시지 않는 그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헌신의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인지 분별하셔서 기쁨으로 지원함으로 헌신하십시오.
헌신도 때에 맞게,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에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선한 의지, 선한 충동, 아니 거룩하고 아름다운 감동이 일어날 때, 이를 애써 억누르지 마십시오.
이런저런 계산으로, 이 눈치 저 눈치 끝에 헌신을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십시오.
세상 일과 자기 일을 위한 충동은 종종 시험의 올무가 되지만, 주님의 일을 위한 충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충동은 거룩한 성령의 명령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령의 명령으로 거룩한 헌신을 위한 충동이 일어날 때, 즉시 순종하십시오.
남이 아니라 내가 보더라도, 정신이 나가거나 엉뚱하고 생뚱맞은 일이라도,
만약 그 일이 진정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면,
지체하지 말고, 아끼지 말고 여러분의 소중한 것을 다 바쳐 헌신하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의 여자처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러분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여러분의 헌신의 행동은 자녀들과 성도들의 마음에 길이, 깊이 감동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길이 새겨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