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데스바네아를 아십니까?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시편 18편 2절에서 다윗이 보여주듯,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체험하셨습니까?
다윗에게 이런 신앙은 어디에서 생겨났을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딤후1장 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신앙의 전수를 통해 디모데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듯이,
룻기1장 16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4장 13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이 몇 세까지 생존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둘 중에 하나라고 봅니다.
첫째는 다윗이 태어났을 때까지 살아 있었든지(장수하여 100세 이상), 아니면 자식에게 신앙전수를 통해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를 아는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모세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말씀들이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도 처음에는 신앙전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지식처럼, 그러한 하나님인지는 양을 치면서 체험을 통해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험들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반석(영원함, 불변, 요동치 않음)과 건지시는 자(모든 위험과 위기에서), 하나님(여러 신들 기운데 유일한 신), 피할 바위(한 번 숨으면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곳), 방패(칼과 창과 화살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함), 구원의 뿔(언약, 살리심), 산성(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성)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 당시 백성들이 이야기를 들을 때 익숙하고 곧바로 인정되는 것들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 온전히 좇음(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체험을 통해 견고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체험을 반복하게 되면 견고한 확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 하나이다는 고백이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시편 18편 1절)
https://youtu.be/QO73NiW7pao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광야를 지나면서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생각하면 어이러니(irony)입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 봅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신지식>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만든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미신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모두가 헛되고, 인간의 상상물이며, 어리석은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 대상이신 신 곧 "하나님"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없다'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순수하다면 완전한 신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이 오염되고 부패하여 자기 생각으로 이해되는 것만 알고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측량할 수 없는 신묘막측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참 신이십니다.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한계가 있습니다.
인산의 이성과 지성이 "무지와 어두움과 눈 멈으로" 인하여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을 아는 지식 곧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공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신지식을 가지도록 도와주십니다.
기적, 이적, 표적을 보아도 사람이 믿지 않는 이유가 려강에 있습니다. 하늘의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이는 버젓이 눈을 뜨고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마음의 결이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묵상, 탐구 등)을 통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보며 현실만 바라본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테스트받고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최고의 테스트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곳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진정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으로 천추의 한이 되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에서입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그만 자신에게 돌아올 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집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천주의 한을 남는 곳도 있습니다.
그곳은 <'가데스바네아'>입니다.
가데스바네아는 <현실과 믿음> 사이에 결단을 요구하는 곳입니다.
가데스 바네아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여 광야를 통과하여 오매불망 기다리던 약속의 땅에 가까운 가나안 접경의 바란광야의 끝자락인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각 지파에서 한 명씩 모두 12명을 선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던 곳입니다(신 1:22-24).
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22 (그러나)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결국 우리가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다수결 원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열 두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그들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 땅에 대해 악평하는 부장적 보고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민 14장 1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머리 위에 <불기둥>을 보면서도 그날 밤을 지새우며 통곡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지리적으로는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 항상 그들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현실과 믿음 사이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데스바네아’는 우리의 삶이 결정되는 곳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낙심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다수결 원리>에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만한 영적인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에 속았고, 결국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그들의 결정은 스스로 가나안 땅을 차지할 믿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낱낱이 보여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원하지만, 공짜로 얻기만 바랬던 곳이지요. 그들에게는 그 땅이 아니라 그 땅을 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보다 복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옛말에 "제사에는 관심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결국 보여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받고 싶은 복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을 인도하시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하시며
그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번성할 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그들이 땅에서 거저 복을 받는데만 온통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들 안에 가나안 땅을 차지할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기적들, 홍해를 건넌 사건,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고,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하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 앞에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가나안에 들어가고 안 가고는 그들이 결정할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말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하신 일이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하고 안 하고 가 없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떠날 때에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할 만한 믿음이 있는지를 시험하시려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그 땅에 들어가게 하면 그들은 하나님보다 그 땅의 문화와 환경에 동화되고 말 것입니다.
훗날 여호수아가 죽고 다음 세대들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내면에 믿음 곧 굳은 심지를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태로로 볼 때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 보람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나의 선택은 과연 옳은 선택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를 자기들이 결정할 사안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들에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
또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무엇을 교훈하려고 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그들에게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졌는지 보여줄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거기서 그들이 가고 싶어 하던 곳을 향해 더 이상 나가지 못한 채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결정은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뼈아픈 장소입니다(신명기 2:14, 민수기 14:33~34).
하나님이 주시는 땅, 그곳은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믿음으로 가는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학교 때 부르던 노래처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좇으라.
민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수 14:8-9절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가데스바네아 일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매일 가대스 바네아에 있습니다.
매일매일 결단하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