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하나님 나라
2. 예수님의 설교에서의 하나님 나라.
(a) 예수님의 설교에 묘사되어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이요 세상적인 모든 것에,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에 상반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으로 기적적이다"(K. L. Schmidt, TDNT Ⅰ 584).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움함으로써(열심당이 바랐듯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재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철저한 율법 준수로써(바리새인들이 바랐듯이) 하나님 나라가 출현하게 할 수도 없다. 그는 겨자씨(마 13:31이하; 막 4:30이하), 누룩 비유와(마 13:33) 비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막 26-29)에서처럼 인내와 확신으로 그 도래를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b) 이 나라는 인자 Son of man의 출현에 의해 이끌어 들여진 우주적 재난의 형태로 오고 있다(눅 17:26; 막 13:26; 막 14:62). 이리하여 예수님은 세상적, 민족주의적 메시야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를 기대하는 유대교의 묵시 전승과 일치한다. 그는 비록 그가 묵시적 표상을 분명히 사용하였으나 동시에 여러 사건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를 회피하였다(예: 하나님 나라의 하늘의 축제, 막 14:25; 마 8:11). 또한 묵시 사상의 이러한 약화는 종말의 표적들을 식별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예수께서 거절하신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 17:20).
(c) 예수께서도 묵시 기자들과 함께 정치적.민족주의적 메시야 개념과 대조되는 우주적.보편적 종말론 유형을 공유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Israel 민족을 통해서 여호와의 뜻이 온 세계에 미칠 것이라는 신앙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선택론(마 10:6)을 지지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은총에 관한 특별한 주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에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마 12:42 병행구 눅 11:31). 그 나라는 이스라엘에서 취하여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마 21:43).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아들들(이스라엘)을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실 것이다(마 8:12; 참조: 눅 13:28).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들의 대표로서의 열두 제자(→ 사도 Apostle)들에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재판관과 통치자의 직책을 약속하셨다(마 19:28; 눅 22:28이하; 참조: 막 10:35-45).
(d) 그 나라가 하나님의 선물이며(눅 12:32) 언약 Covenant에 의해 사람들에게 맡기었다(디아티데미)는 사실은(눅 22:29)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하여야 그 나라를 받을 수 있을 뿐이며(막 10:15 병행구 눅 18:17; 참조: 마 18:3; 요 3:3), 사람은 그 나라를 기다려야 한다는(막 15:43 병행구 눅 23:51) 교훈과 상응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에이세르케스다이)비유가 특히 자주 나타난다(마 5:20; 마 7:21; 마 18:3; 마 19:23이하; 마 23:13; 요 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는 완전히 미래의 의미가 들어 있다(마 25:34; 막 9:43이하). 그러나 예수의 인성에 있는 하늘 나라의 현존에 의해 개인은 명백한 결단에 직면한다. 이 상황의 예, 혹은 아니오 라는 양자 택일의 성격이 예수의 과장법적 말씀에 의해 예증된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참조 18:8이하; 막 9:43-48).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 내시 Eunuch)가 된 자들도 있다(마 19:1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 단순한 열정의 결과가 아니라, 먼저 심사 숙고한 다음(눅 14:28-32)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그러한 결단을 하여야 한다(마 7:24-27). 그러나 그러한 결단을 할 때에 자신의 가족에게 미움을 받기까지 자기를 부인함을 의미하는 희생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마 10:17이하; 마 10:37).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은 격렬한 열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선물을 넘치게 기뻐하는 마음의 바탕에서 나와야 한다(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의 비유들, 참조: 마 13:44-46).
(e)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초월적이요 초자연적이다: 그 나라는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굶주린 자가 배부를 것이며, 슬픈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8복 참조: 마 5:3-10; 눅 6:20이하). 그 나라는 사람들이 자기 원수들을 사랑할 것을(마 5:38-42; 눅 6:27이하; 눅 6:32-36), 그리고 그들이 공중의 새들이나 들의 백합화들처럼 염려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마 6:25-33; 눅 12:22-31). 여기서도 다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며, 예수님 안에서만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며, 그의 말씀과 행위에서 그 나라는 이미 출현하였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의 무리들을 찾으시어 그들에게 식사를 베풀어 친교를 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데서 그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왕이 그의 연회에 거지들과 집 없는 자들을 초대하듯이(마 22:1-10), 아버지의 사랑이 다시 탕자를 받아 들이듯이(눅 15:11-32),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듯이(눅 15:4-7), 여인이 잃은 동전을 찾듯이(눅 15:8-10), 주인이 선한 마음으로 마지막 시간에 고용한 삯군들에게 하루의 품삯을 지불하듯이(마 20:1-15),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가시어 용서를 약속하신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 죄 Guilt의 무거운 짐이 어떤지를 아는 죄인들만이(눅 7:41-43)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사죄를 감사할 줄 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막 2:17; 참조: 마 9:12; 눅 5:31).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선포의 특징은 그가 새로운 신국론을 전하였거나 그가 사람들의 묵시적.종말론적 기대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를 그의 인성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이요, 단순히 그의 인성이다"는 것이다(J. Schniew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