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가 뭐예요?
사전적 의미로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을 말합니다.
자유의지란 이처럼 외부적인 어떤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논쟁은 스크라테스부터,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을 거쳐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에 따라 신앙전반에 걸쳐 해석을 달리 한다.
<회심>에 관한 문제, <성화>와 관련하여 죄와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벗아날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돌이킬 수 있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또 교육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에 따라 교육방향도 바뀐다.
인간 탐구의 학문에서 중요한 의제인데, 동양사상에서도 성선설과 성악설을 역시 의지자유에 관한 논쟁인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있어서도 중대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도 매우 결정적인 요소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의지에 대하 설명은 웨스트민스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제9장 자유 의지
1.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선천적 자유를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그 의지는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거나, 또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마17:12; 약1:14; 신30:19).
2. 인간은, 무죄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그가 아주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며 행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소유하였으나(전7:29; 창1:26), 아직 가변적이어서, 인간은 그 상태에서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다(창2:16,17;3:6).
3.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에 수반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롬5:6; 8:7; 요15:5). 그래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롬3:10,12),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엡2:1,5; 골2:13),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또는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가 없다(요6:44,65; 엡2:2-5; 고전2:14; 딛3:3-5).
4.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그를 은혜의 상태로 옮기실 때, 하나님은 그를 그가 당하고 있는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신다(골1:13; 요8:34,36).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영적으로 선한 것을 그가 자유롭게 결심하며 행할 수 있게 하신다(빌2:13; 롬6:18,22). 그렇지만 그의 남아 있는 부패로 인하여, 선한 것만을 전적으로 결심하지 못하고, 악한 것을 또한 결심한다(갈5:17; 롬7:15,18,19,21,23).
5. 인간의 의지는 오직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때에만, 전적으로 그리고 한결 같이 자유로이 선만을 행할 수 있게 된다(엡4:13; 히12:23; 요일3:2; 유24).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이성적이기 위해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녀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이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은 악한 행동이나 선한 행동이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악의 근원이 아니다.”라고 논증합니다.
이성은 어떤 일의 진위나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였고, 자유의지를 지녔다.
인간에게 이성의 판단과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다.
그 선택이 선이든 악이든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은 이처럼 창조시부터 이미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원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순종할 수도 있었고 불순종을 할 수 있었다.
이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간교한 뱀은 하와를 유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하므로써 악을 선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의 열매를 먹고 범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말씀하셨다.
에라스무스 : 타락/ 이성이 손상되었어도 의지는 남아 있음
기독교 인문주의 철학자 에라스무스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지만, 그들의 이성이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며 단지 손상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어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면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라,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이성이 부패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타락한 인간은 결국 은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루터 : 타락/이성 -심각한 손상으로 노예의지
루터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죄라고 반박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인간 스스로 선택하거나 노력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있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단지 율법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것은 모두 다 헛된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에 해당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여야만 구원이 주어진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그 어떤 의지라도 결국 죄의 영향에 의해서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루터는 하나님의 권능과 전적인 주권에 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멸망당할 세상의 권주로서 사탄이 방해하고 있기에, 그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실 때에는, 의지를 포함하여 전체 총체적 인격을 다 포함하여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유케 하신다.
루터가 "의지의 노예됨"에서 자주 인용한 에스겔 18장 23절,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결정을 좌우당하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유하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그가 구속하기로 작정한 바에 따라서,
자유로이 용서를 베푸시고, 은혜를 하사하신다.
하나님의 자유하심은 아무런 구원받을 자격이 없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 어떤 사람도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악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단순히 사람의 심령을 단독적으로 변화케 하여 선한 목적을 향해 가도록 돌이키는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작품이다.
에라스무스 : 인문주의 - 헬라철학 영향/오리겐 신학 : 영은 보존/ 육체만 타락 - 낙관적
에라스무스가 전형적인 인문주의적 낙관론을 피력한 것으로, 보편적인 교육과 사회적인 개선을 진행하면 전쟁을 포기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사상의 근원적인 뿌리는 살전5장 23절에 대한 오리겐의 해설을 받아들였다.
헬라사상의 이원론적 사고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오리겐>이 인간의 세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육체만 철저하게 타락했고,
영은 여전히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영을 강조하면서 휴머니즘적인 낙관주의를 장려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반으로 오리겐의 해석을 활용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적 기독교를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은 지식적으로만 확장된 중세말기의 또 다른 변형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