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적인 열정>의 삶을 살다 간 다산 정약용의 유산
팔당댐을 조금 지나면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가 나온다.
팔당댐은 두개의 물줄기의 머리라고 하여 ‘두물머리’로 더 알려져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다.
이 곳에 정약용의 생가가 있다.
우리가 세종 다음으로 대왕으로 부르는 임금이 정조대왕이다.
그는 세종에 버금가는 위대한 위대한 개혁의 성군이었다.
정조는 열 살 터울인 정약용(1762년 8월 5일)과는 군신지간이었다.
둘은 비록 신분은 군신었어도 동시에 마음을 나누는 벗이기도 했다.
이런 신하를 얻은 것은 정조에게는 행운이요, 성군을 만난 정약용도 그러했다.
정조는 경연(經筵)[경연은 세종이 국왕에게 신하들을 모아놓고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함으로써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인의(仁義)를 배양하고 국가 체제의 안정을 모색하기 위함]을 좋하였고,
신하들에게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영화, <중용23장> 참조
정조(正祖)는 신하들과 수시로 허심탄회하게 소통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정조가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 한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을 때 정조가 그에게 특별히 옥필통을 선물했다.
정조는 훗날 정약용을 자기 곁에서 국사를 나눌 정승에 앉히고자 마음에 두고 있었다.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
그러나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였으나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산은 남은 생애조차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향년 74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들은 언제 쓰였을까?
그가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졌다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으로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갔다.
만일 당신에게 인생의 절망이 찾아온다해도 절망하지 마라.
다산은 "어떻게 나를 사랑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절망하지 말라.
우리는 다산 정약용에게서 몇 가지 삶의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라.
누구에게나 절망과 시련의 시기가 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인생이 힘들다"고 암시하지 마라.
다산은 경상도 포항과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삶과 죽음이 오가는 유배의 삶을 살았다.
둘째, 좋은 친구를 사귀라.
다산은 나이 많는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배울 사람과 학문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을 사귀는데 나이를 묻지 마라
셋째, 공부하는 일이 어렵다고 자신에게 암시하지 마라
평생에 500권의 책을 읽기도 어려운데, 다산은 초인적인 삶을 살면서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책을 가까이 하라. 조선시대의 현자들의 학습법을 배우라.
넷째, 세속적인 성공에 집착하지 마라
다산을 유배보내고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사람, 서용보. 참으로 기가막힌 관계였다.
다산이 벼슬하던 때보다 벼슬에서 멀어졌을 때 오히려 더 명성과 이름을 남기게 된다.
다섯째, 인생에 여유가 없다고 하지 마라
정약용은 호를 다산(茶山)이라 하였고,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여기서 "여유"는 마음의 여유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언제 자신의 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아야 했다.
다산은 유배를 가는 순간부터 "한 세상을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지었는데, 여유는 '두렵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망설이기를 겨울에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하고, 겁내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신중히 하라”는 데서 유래했다.
다산은 언제 사약이 내려질지 유배지에서도 그 지역의 특산물인 차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호가 다산이다.
여섯째 전문성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마라
다산은 과학분야에 대한 것을 특별히 배우지 않았어도
정조로부터 수원에 화성 건축을 명받았을 때 이를 설계했고
당대 최고의 기술인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여 건축비를 상당하게 절감하여 정조로부터 치하를 받았다.
그가 만든 기중기와 녹로는 유명하다.
녹로(轆轤) :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커다란 돌을 약 10미터 높이로 들어올리던 장비